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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석 마샹스Machance Mar 17. 2016

'비후까스(beef cutlet)', 아버지와 어머니

지난 금요일에 아버지께서 기운이 없어 보이시기에 '드시고 싶은 음식 있으세요?' 여쭸더니 '비후까스가 먹고 싶다.'라고 하셨다.


걸음이 불편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가기에 편리한 경양식집을 찾아서 예약을 해 두고, 주말에 부모님을 모시고 갔다.
출입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으신 어머니 곁에 앉으신 아버지께서는 메뉴의 가격표를 보시더니 "비싸다, 괜히 먹고 싶다고 했다." 하셨다.
어릴 적에 내가 먹고 싶다면 그것이 얼마인지 따지지 않고 사주셔 놓고도 얼마 되지 않는 음식 값이 마음에 걸리시나 보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엄마, 제가 처음 경양식을 먹어 본 것은 엄마의 계 모임에 따라가서 먹어 본 돈가스였어요."하고 말씀을 드렸더니 기억하시는지 식당 이름을 '호남동에 있던 동원식당'이라고 말씀해 주신다.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때 그 식당의 내부 구조랑, 반짝이던 식기들, 그리고 엄마가 먹기 좋게 썰어 주셨던 질기지 않고 부드러운 고기와 소스 맛까지...
이 이야기를 필두로 50년도 넘은 시절의 말씀을 두 분께서는 이어 나가셨다.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는 배고프고 날씨마저 추웠던 시절의 고생스러운 기억이 추억이 되어 식당 안 우리 식탁 위를 둥둥 떠 다녔다.


내가 중학교 시절, 아버지께서 하시던 가게에 불이 나서 전 재산이 불꽃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더구나 아버지는 물론 가게에서 함께 일하던 직원까지 화상을 입어 1년을 넘게 병원에 입원하셔야 했었다. 이렇게 아프신 아버지를 어머니께서는 간호도 하실 수 없었다. 화재가 나던 가을, 우리 형제는 제일 큰 딸인 누나가 고등학교 3학년, 큰 아들인 내가 중학교 3학년이었고, 아래로 어린 동생들이 셋 더 있었다. 다섯 명의 자식들이 먹고살아야 할 당장의 생계와 병원비 마련을 위하여 살림만 하시던 어머니께서는 삶의 현장에 나서야만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께서는 지인의 소개로 보험회사에 취직하셨고, 돈을 모으기 위해 굶으시면서 시내버스비도 아끼기 위해 걸어 다니시면서 보험을 모집하고 수금을 하셨다. 공부를 잘해서 영재라 불리던 누나는 일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대학 입학을 포기하고 취직에 나섰고, 나는 졸업 후 바로 취직이 된다는 공업고등학교로 진학을 했다. 어머니의 노력과 희생하신 결과로 그나마 우리 형제들은 굶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부모님께서는 갑자기 어려워진 가정경제로 우리 자식들의 앞길을 막았다고 두고두고 미안해하시지만, 부모님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우리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우리 형제자매는 알고 있기에 부모님께 잘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보험회사에 다니시며 무리하신 어머니께서는 관절에 이상이 생겨서 제대로 걷질 못 하신다.
그보다 더 옛 시절, 못 먹어 아픈 자식들, 특히 원인도 모르는 고열로 곧 죽어 가는 나를 안고 소아과로 달려갔는데 진료를 마친 후에야 맨발로 서 있는 어머니의 발을 본 간호사가 빌려 준 병원 슬리퍼를 신고 오셨다는 말씀은 처음 듣는 이야기로 내 자식이 아팠을 때 느껴졌던 마음을 돌려 어머니의 그때 마음이 공감이 되어 감사함과 죄송스러웠다.
내 기억엔 없는 어른들의 안부와 사는 이야기를 부모님 두 분이 나누시는데 대부분이 돌아가셨다는 말로 끝났다. 나중에 내가 나이 들어서 내가 아는 이들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일상처럼 듣게 된다면 나의 마음은 어떨까? 지금 부모님처럼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비후까스가 나왔을 땐 그 옛날 엄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엔 내가 고기를 먹기에 알맞은 크기로 썰어 드렸다.
수전증이 있으신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썰어진 고기마저 포크에서 자꾸 떨어트리신다. 결국 앞에 앉은 내가 접시를 들어 어머니 입 가까이에 대어 드리고서야 어머니께서는 고기를 드실 수 있었다.
"참 맛있다. 네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예전 살던 동네에서 좋은 음식을 먹어 본다. 고맙다."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신다.
왜 진즉 경양식집에 모시고 올 생각을 못 했었을까?라는 생각에 죄송스러웠다.
"저도 덕분에 옛날이야기를 듣고 어린 시절 생각이 나서 좋았어요. 부모님 말씀드리며 예약을 했더니 오늘은 음식에 특별히 신경 썼는지 더 맛이 있네요." 했다.
조각난 스테이크 수만큼의 추억과 함께 식사를 마쳤다. 식당을 나와 차로 옛 시절의 흔적을 찾아 부모님을 이곳저곳 모시고 다녔다. 창문 너머로 밖을 내다보시며, "여기가 태평극장 있던 곳 아니냐?" 고 물으시고 극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불이 난 그 가게에서 장사를 하시면서 "극장에 광고를 냈더니 무료로 영화를 볼 수 있는 초대권을 여러 장 보내와서 동네 분들과 함께 영화를 봤었어야."라며 웃으신다.
부모님 신혼 때부터 시작해서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지금은 광주의 구도심이 된 충장로에 인접한 호남동에 자리한 동네 곳곳마다 추억 어린 이야기들이 보물인양 숨겨져 있었다.
지금은 건물이 서 있는 나의 태를 묻은 탯자리가 있는 장소를 끝으로 비후까스로 시작된 부모님과 함께한 추억 탐방이 끝이 났다.

사실 오늘 처음엔 몸이 불편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나온 걸 후회했다. 식당 입구의 작은 계단 3개가 있다는 것을 간과한 내 잘못 때문에 계단을 넘으며 어머니를 더 불편하게 해 드린 것 같아서... 그러나 오늘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옛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을 들으면서 외출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비록 차에서 내리시지는 못 하셨지만, '어느 장소에 한 번 가보자'하시면, 가서 보여드리는 식으로 어머니께서 다니셨다는 초등학교까지 곳곳을 다니며 볼 수 있게 해 드렸더니, "많이 변했다. 여기다 혼자 내려놓으면 어디가 어디인지 몰라서 집에 찾아가지도 못하겠다."고 하시며 기억나는 장소와 연관된 말씀을 즐겁게 하시는 모습에서 젊은 시절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얼핏 설핏 볼 수 있었다. 오후 한 나절 잠시나마 젊은 시절을 회상하실 수 있었으니 오늘 밤은 부모님께서 젊은 시절 활기차게 사시던 옛 동네 거리를 활보하지 않을까? 나를 귀찮게 하기 싫다는 아버지를 설득해서 다음에는 어디로 모시고 가서 무얼 대접해 드릴까?

몇 년 전부터 부모님께서 드시고 싶다는 음식이 있다면 바로 드실 수 있게 해드리려고 노력한다. 나중에라도 그 음식을 보면 즉시 드실 수 있도록 해드리지 못해서 드시지 못하고 돌아가시면 그 죄스러움이 내 평생의 한이 되지 않도록...
편찮으셔도 좋으니 부모님께서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못난 자식이지만 조금이라도 더 자식 곁에서 기다려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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