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규석 마샹스Machance Mar 14. 2016

나스첸카...

어제 대학 친구의 어머니 상가에 갔었습니다.

조문을 하고 먼저 와 있던 친구들과 합석하여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상가인 것도 잊고 크게 웃다가 움찔하기도 했지요. 그러다가  상을 당한 친구의 아내를 오랜만에 만나서 인사를 했습니다. 순간 떠 오르는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친구 아내의 친구, 음대생으로 메조소프라노였던 여학생.

상을 당한 친구가 아직 결혼하기 전으로 연인 사이인 시절, 음대생과 나는 연인인 친구의 남녀 들러리로 우리는 처음 만나습니다. 처음엔 넷이 만나다가 나중엔 우리 둘만의 만남으로 이어졌지요. 그렇게 만남이 이어지면서 좋아하는 감정이 생겼지만 장난으로라도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만나면 그저 서로 웃기만 했습니다. 지금 와서 되돌이켜 생각해 봐도 혼자만의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그녀도 나를 좋아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나는 그녀를 사랑하였기에 사랑받지 못해도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여학생이 교생 실습으로 다른 도시로 떠나가고, 나도 취업을 위한 시험공부에 바빠지면서 뜸해지던 만남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끊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만나게 된 끈이 되었던 친구도 결혼을 해서 우리를 이어주는 것은 없었습니다. 가슴 저린 그리움을 남겨 두고 떠난 것이 그녀의 선물만 같았던, 사랑에 서툰 내 어린 날의 한 페이지는 그렇게 무심히 흘러갔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도 여학생의 집 근처 버스정류장까지 바래다주며 헤어지곤 했던 법원 앞 버스정류장을 우연히라도 지날 때면 가던 길을 멈추고 뻐근하게 아파왔습니다. 뛰는 가슴이 진정될 때까지 그 시절 뒤돌아서 가던 여학생의 모습을 한참을 떠 올리다가 내 외로운 그림자가 석양을 따라 길게 늘어질 때쯤 돌아서곤 했습니다.

어둠이 깃든 교정에서 그녀가 불러주던 가곡들은 주로 슈베르트의 곡이었습니다. 노래라고는 통기타를 치며 부르는 대중가요가 전부인 것으로 알던 공대생인 내게 교과서에 소개되어 그나마 알 수 있는 곡으로 선곡해서 불러주었습니다. '송어, 보리수, 자장가, 들장미'는 기억나는 슈베르트의 곡이고, '비목, 그리운 금강산, 봄처녀, 내 마음, 구름, 그대 있음에' 등등은 그녀를 따라 부르던 곡으로 지금도 내가 드물게 흥얼거리는 곡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노래를 남겨두고 간 그녀는 가끔씩 노래를 따라 내 가슴에 다시금 살아나곤 합니다. 이 봄 그녀는 또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요? 그녀가 부르고 있을 것 같아 나도 나지막이 소리 내어 불러봅니다.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오시는고

임 찾아가는 길에 내 집 앞을 지나 시나
이상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인가
미안 코 어리석은 양 나가 물어볼까나'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백야의 여주인공 나스첸카처럼 홀연히 떠나 지금은 누군가의 아내가 된 그 여학생의 소식을 친구 아내가 슬며시 들려주었습니다.
이제는 무덤덤해질 때도 되었건만 뜨거운 난로에 손 끝이 닿은 듯 화들짝 놀래는 마음은 무엇일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내 마음 보푸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