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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석 마샹스Machance Mar 11. 2016

유럽의 지붕 융프라우요후와 시민

베른을 떠나 인터라켄을 거쳐 융프라우요후로 가는 길.
베른에서 출발할 때는 안개 비가 내리더니 인터라켄에서는 눈으로 내린다.
눈과 산을 좋아하는 아내가 소녀처럼 밝게 웃는다. 아들도 덩달아 웃으니 나까지 행복해진다. 가족 내에서 행복이 전염되는 속도가 더 빠름을 다시 확인한다.

산 아래에서는 사람 사는 집과 산악 열차가 풍경이 되더니, 산에 오를수록 산 그 자체가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 자연이 풍경을 만들었고, 사람이 풍경 속에서 살면서 또 하나의 풍경이 되고 자연이 된다.
보는 곳곳이 절경이고, 12월이나 1월의 달력 사진이다. 눈송이를 이고 선 사철 푸르른 나무 또한 그 자체로 크리스마스 트리다.

눈을 머금은 숲은 청량한 공기를 내뿜는다. 풀 숲 위로 쌓인 눈 위에는 또각또각 작은 동물이 남긴 발자국이 또렷이 남아 있다. 철로 옆 풀숲을 지나간 동물은 지금 어느 나무 아래에서 융프라우를 호흡하고 있을까?

스핑크스 전망대 밖.
눈발이 우리를 반기며 휘감아 돌았다. 눈발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산 위에 비스듬히 걸친 태양마저 빛을 잃고 희뿌연 안개 속에서 달처럼 하늘에 겨우 붙어 있었다.
산 아래 강과 호수와 들판을 휩쓸고 올라 온 눈발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하늘과 바위와 나무들에게 자랑질해댔다.
우뚝 선 산은 눈발을 온몸으로 말없이 받아들였다. 눈발의 거센 기세는 몇 만년을 한 자리에 서서 묵묵히 견디는 산 앞에서 잦아들어 쌓이고 나무와 바위에 붙어서 융프라우의 일부가 되었다.
화무십일홍 세불십년장(花無十日紅 勢不十年長)이고, 지자불언 언자부지(知者不言 言者不知)다.

융프라우 산의 일부가 된 눈을 한 움큼 집어 입에 넣었다. 차게 얼어 있던 산의 신선한 공기가 입안 가득히 퍼져 난다. 나도 융프라우가 된다.
'아~'하고 소리를 내어 본다. 나의 소리는 메아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얼어붙어버린 나의 소리도 융프라우가 되었다.
아니, 산에 오르기도 전에 어쩌면 나는 이미 융프라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저 아래 먼발치에서 만년설을 보았을 때 마음은 이미 융프라우 얼음 궁전에 가 있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융프라우이고 융프라우가 나다.

인터라켄 동역에서 두 시간여에 걸쳐 세 번을 갈아 탄 산악열차가 올려다 준 3,454m의 융프라우에 도착하니 고산병이 우리 일행을 먼저 맞이한다. 고산병 증상을 호소하는 일행에 맞춰서 구경하다, 쉬다를 반복해야 했다. 초등학생이 특히 힘들어했다. 대학생인 아들도 조금은 힘들어한다. 나도 조금 어지럽다. 사람은 살던 대로 살아야 한다.

산악열차와 융프라우 스핑크스 전망대가 수많은 스위스 시민들의 노동의 결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융프라우에서 알았다. 세상은 지도자가 이끌어 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 시민들이 이끌고 만들어간다. 지도자는 물 위에 뜬 배일뿐이다. 시민은 배를 띄우는 물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다만 배를 바라보고 물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수가재주 역가복주(水可載舟 亦可覆舟), 물은 배를 뜨게도 하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시민도 지도자도 자주 잊는다. 선거 때가 돼서야 잠깐 동안 본질을 깨닫고 선거가 끝나면 또 역할이 바뀐 체 그렇게 살아간다. 시민 교육이 필요한 이유다.
지도자는 눈발이고 시민은 융프라우요후다.

일행 모두가 스위스에 살았으면 좋겠다 한다.
스위스의 수도인데도 고즈넉한 베른의 거리. 자동차로 넘쳐나는 프랑스보다 몇 대의 트램과 드문드문 지나는 자동차들 그리고 여유롭게 걷는 사람들.
파리와 베른, 인터라켄, 어느 곳에서도  독촉하거나 서두르는 사람을 발견할 수 없었다. 매사 서두르며 스스로를 채근하는 나의 조급함이 부끄러웠다. 여유로움이 부럽다.
살 나라를 선택하라 한다면 모두가 프랑스보다는 스위스를 선택하겠단다.
시민들의 의식이 더 높아지고, 그래서 똑바른 정치인이 자신만을 위한 정치가 아닌 시민을 위해 노력하게 된다면 낭비되는 세금이 줄어들고 우리나라도 더 좋은 나라가 되지 않을까? ㅡ 여행하는 우리들끼리 토론한 결과다.
내 직업은 회사원이다. 그래서 회사 업무를 걱정한다. 정치인의 직업은 정치다. 따라서 정치 걱정은 정치인의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시민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 정치인이 잘 못한 것을 시민들이 이해해줘야 하고, 국사 교과서 걱정도 해야 하며, 국가가 책임져야 할 안전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정치인들이 편 갈라놓은 지역감정도 먹고살기에 바쁜 시민들이 해결해야 할 몫이다.

우리나라가 시민들이 여행하면서도 정치를 걱정하는 나라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직접민주주의의 본산인 스위스에서 간절히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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