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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규석 마샹스Machance Aug 15. 2016

아이스크림과 융프라우

융프라우

아이스크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다.

아이스크림 한 입 베어 물면 입안 가득 감겨드는 달콤함이 언제나 나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간식 중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것이 또 있다. 초콜릿이다. 초콜릿은 입에 닿는 첫 감촉이 딱딱하다. 뿐만 아니라 녹을 때까지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려 애쓰다 사라져 간다. 초콜릿 뒷맛에 은근히 드러나는 씁쓸함은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스크림은 소프트 아이스크림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처음부터 부드럽다. 혀에 닿자마자 녹아드는 아이스크림은 결코 자신의 형태를 고집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끝맛까지 달다.


아이스크림 가게를 방문해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주문하자 콘 컵에 아이스크림을 넘치도록 담아준다. 아이스크림은 콘 컵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콘 컵 위까지 나선형으로 감아 오르다가 고깔처럼 뾰족한 머리를 내민다. 그 높이가 커다란 밥공기에 고봉으로 담아 먹던 머슴밥보다 더 높다. 아이스크림을 받아들기 전부터 군침을 꿀꺽 삼킨다. 나의 미각이 그 행복한 맛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뾰족한 머리의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면 나는 한 입 베어 물기를 망설인다. 마치 아이가 맛있는 과자를 아껴 먹을 때처럼 아이스크림 끝에 혀를 살며시 대어볼 뿐이다. 살짝 혀끝을 대었을 뿐인데도 아이스크림은 변함없이 차갑고 달콤한 맛으로 혀끝을 파고든다. 혀끝을 흐르던 맛은 수천 개 미뢰(味蕾)의 협곡을 지나 뇌를 자극한다. 잠자던 세로토닌 호르몬을 불러일으켜 행복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아이스크림의 뾰족한 머리는 스위스의 융프라우(Jungfrau)를 닮았다. 지난겨울 스위스 수도이자 곰의 도시인 베른 역에서 기차를 타고 인터라켄 동역까지 갔다. 인터라켄 동역에서 융프라우 행 열차 표를 끊었다. 30분 간격으로 다니는 열차를 기다리면서 융프라우를 올려다보았다. 하얀 눈으로 잔뜩 치장한 융프라우가 아이스크림을 닮았다는 생각에 이르자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아래에서 본 융프라우는 몇 년을 두고 먹어도 남을 만큼 커다란 소프트 아이스크림이었다.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까?’ 하고 망설이는 사이에 융프라우로 가는 기차가 출발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쩝쩝’ 입맛만 다시며 기차에 올라야 했다. 인터라켄 동역을 출발한 열차가 그린데 발트 역을 지나 클라이 샤이 텍 역에서 멈춰 섰다. 이제는 산악열차로 갈아타야 한다. 아이스크림으로 치면 인터라켄 동역에서 클라이 샤이 텍 역까지는 콘 컵이고, 클라이 샤이 텍 역에서 융프라우까지는 콘 컵의 경계에서 아이스크림 고깔 머리까지 이어지는 아이스크림의 본체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고깔 머리까지 오르는 급경사 길을 산악열차로 오른다. 산악열차는 콘 컵 위를 나선형으로 감싸고오르는 아이스크림처럼 융프라우를 지그재그로 감싸고 돌며 올랐다. 톱니바퀴까지 단 산악열차임에도 산을 오르기에 벅찬지 종점을 앞두고는 헐떡이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스핑크스 전망대와 이어진 융프라우 역에서 산악열차가 멈추자 아이스크림이 녹을까 급하게 먹는 아이처럼 서둘렀다. 융프라우를 코앞에서 볼 수 있는 스핑크스 전망대로 가는 엘리베이터 타는 사람들 속에 우리도 파묻혔다. 스핑크스 전망대에서 눈보라치는 밖으로 나와 융프라우의 하얀 맨살을 더듬었다. 겨울 속 융프라우 위를 휘날리던 눈송이는 내 살갗에 닿자마자 망설일 틈도 없이 녹아 형체를 감춘다. 인터라켄 역에서 올려다 보이던 아이스크림이 눈 속에 숨어버렸다. '더 서둘러야했어. 아이스크림이 녹아 없어진 게야.'

융프라우 정상으로 오르는 기슭, 하얗게 쌓인 눈 위에 큰 대자로 누웠다. 인터라켄 동역에서 본 융프라우 사진 속 하늘은 푸르렀다. 그러나 하얀 눈발이 날리는 하늘은 회색빛으로 파란 하늘을 감추어버렸다. 우리나라에선 해가 눈을 녹인다. 그러나 융프라우에서는 눈이 해를 녹였다. 눈에 녹은 해는 빛을 잃고 자국마저 희미하게 하늘 끝에 겨우 매달려 있었다. 나처럼 눈에 누운 사람들과 여기저기 눈밭에 서서 사진 찍기에 바쁜 관광객들의 모습이 아이스크림 위를 장식하는 울긋불긋한 과자부스러기 같았다. 그렇다. 융프라우에서는 나도 한 조각 과자부스러기일 뿐이다. 융프라우라는 대자연 속에 속한 작은 자연일 뿐이다. 한 움큼 눈을 집어 입에 넣었다. 차디찬 융프라우의 겨울이 입안에 들어와 더 차갑게 녹았다. 차가운 눈덩이가 아이스크림인 듯 눈 물이 되었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맛본 아이스크림에서 느꼈던 차가운 바닐라 향이 바람을 타고 코끝을 차갑게 두드린다.     


아이스크림은 내게 사랑이다.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마다 아버지께서 해주신 말씀이 생각나곤 한다. 어린 내가 아버지가 하시던 가게의 금고에서 동전을 집어다가 길 건너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열 번이나 사 먹더란다. 물론 그때 먹었던 아이스크림은 하드 아이스크림에도 못 미치는 빙과류, '아이스케키(Ice Bar)'이었다. 학교도 안 다니는 어린 아이가 가게를 열 번씩이나 오가며 사다 먹으니 배탈 날까 걱정되어 말리셨단다. 어린 줄만 알았던 아들이 돈을 가져다가 이스케키 사다 먹는 모습이 예쁘고 사랑스러워 처음엔 기쁘고 기특한 마음에 그대로 두셨다는 말씀까지 덧붙이셨다. 이 말씀을 하시던 아버지의 얼굴엔 어린 아들을 둔 젊은 시절의 미소로 가득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이 젊으셨을 때나 철부지 아들이 이순(耳順)을 내일 모레로 두고 있을 만큼 세월이 흐른 지금이나 변함없이 사랑의 눈으로 나를 보신 거다. 따듯한 구석이라곤 어느 한군데 찾아볼 수 없이 차갑기만 한 아이스케키에서 따뜻한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서 나는 아이스크림을 더 즐겨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스크림은 달면서도 차가운데 그 맛이 있다. 사실 맛의 종류에는 오미(五味)라 하여 달고, 쓰고, 짜고, 맵고, 신 맛은 있어도 찬 맛이란 것은 없다. 아이스크림이 달기만하고 차갑지는 않다면 어떻게 될까? 밍밍한 설탕물 같을 것이다. 또 사람들은 단 맛을 보기 위해 급하게 먹으려 할 것이다. 급하게 먹으면 체하는 법이다. 물도 씹어서 천천히 먹으라 하지 않았던가? 찬 것을 급하게 먹으면 양쪽 눈 뒤쪽 관자놀이 근처가 죄어 오는 듯 아픈 아이스크림 통증을 누구나 경험했으리라. 아이스크림이 찬 맛까지 지닌 것은 아무리 맛있어도 천천히 먹으라고, 인생은 천천히 사유(思惟)하며 사는 것이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은 아닐는지….


아이스크림은 또한 내게 휴식이다. 추운 바람이 부는 겨울엔 땅위를 기며 자라던 잡초도, 하늘로 가지를 뻗어 키를 키우던 나무도 휴식의 시간을 갖는다. 겨울처럼 찬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는 아무리 바쁜 사람이라도 어디에 건 걸터앉는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면 미사에서 정결한 마음으로 기도하듯이 마음 가라앉히고 차고 단 맛을 음미한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10여분의 휴식 시간을 내게 선물한다. 뜨거운 머리를 차갑게 식히고 혼란스러운 생각을 단 맛 하나로 모은다. 그렇게 아이스크림은 내게 기쁨이고 즐거움이다.     


나는 아이스크림 같은 사람인가? 추운 겨울이건 더운 여름이건 사철가리지 않고 냉철함으로 사태를 파악하고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우지는 않는가? 항상 냉철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포근히 감싸 안는 부드러움을 겸비하였는가? 모든 사람들이 나로 인하여 꿀 맛 같은 행복함을 느끼게 하는가? 아이스크림 고깔 같은 융프라우, 하늘을 만질 듯 높은 그곳에서 어깨 위에 올려놓았던 눈송이처럼 내 어깨 위에 다른 사람들을 무등 태워 그들을 더 높은 자리에 두었는가? 고깔 쓴 머리를 제일 먼저 내어주는 아이스크림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내 머리를 숙이며 나를 낮추는가?

이제라도 아이스크림 먹기만 좋아하는 단계를 넘어서야 하지 않겠는가? 나도 아이스크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콘 컵 까지도 먹을거리로 기꺼이 내어 놓는 아이스크림과 같은 그런 사람 말이다.


* 제목 배경 사진은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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