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티멘털이 아니라 센티멘탈...
영화를 보고 싶어서 평일 낮에 극장을 찾았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 이름을 처음 들어봤고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라는 이름을 많이 들어본 영화를 찍은 감독이라고 한다. 끝나고 보니까 그 영화의 주인공이 이 영화에도 나오는 것 같다.
영화의 주인공 노라는 큰 극장에서 주연을 맡는 유명한 연극 배우다. 동생은 아이를 한 명 키우며 주변에 살고 있는 학자인데 이들의 엄마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지 자매가 어릴 때 살던 집에서 장례식 후 다과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아버지 구스타브가 찾아온다. 아버지는 유명한 영화 감독이면서 자매가 어릴 때 이혼하고 집을 떠났다. 자매는 쉽지 않은 삶을 산 것 같다. 어머니가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정신적으로 망가져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노라는 잘 나가는 유능한 배우지만 우울증이 심하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 패닉 상태에 빠져 사람들을 긴장시키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그런 노라에게 아버지가 딸을 위해 쓴 대본으로 같이 영화를 찍어보자고 한다. 하지만 노라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아직 많다. 어릴 때 자신들을 버리고 떠나서 힘들게 자랄 때 자신들을 외면한 사람이었으니까. 노라는 아버지를 미워하지만 아직도 원망하고 그러면서도 아버지의 능력을 높이 산다.
구스타브는 천재적인 감독이었고 지금도 개성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 하지만 훌륭한 사람은 아니다. 술을 진탕 마시기도 하고, 딸들에게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사과하거나 미안해하지 않는다. 물론 변명하지 않는 점은 높이 산다. 딸이 작품을 거절하니까 자신의 작품을 높이 사는 미국 배우에게 역할을 제안한다. 내가 젊은 때 많이 봤던 예쁜 배우 다코타 패닝의 동생 엘르 패닝이 이 미국 배우로 나오고 구스타브 감독의 각본을 이해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연기에 임하는 멋진 모습이 참 따뜻했다. 하지만 그렇게 열정적으로 연구한 덕택에 그 역할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된다.
요아킴 트리에는 섬세한 감정을 잘 다루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불편한 관계가 많고 재미있을 만한 사건이 별로 없어도 영화에 집중해서 볼 수 있었다. 화면을 가만히 보다가 배우의 눈빛에 깜짝 놀랄 때도 있었다. 특히 아버지 구스타브 역을 맡은 스텔란 스카스가드의 응시하는 눈에서 대단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걸 느꼈다. 그런 집중은 그 배우의 역량이 아닐까 싶다. 집중할 때 머리가 좋아지는 것 같다.
엉뚱한 생각일 수 있지만, 얼마 전 한국은 행복지수가 세계 147개국 중 67위이고 1위는 핀란드, 그리고 상위권에 북유럽 국가들이 있다는 기사를 봤다. 그래서 그런지 노르웨이가 배경인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도 다들 기본적으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노라 자매가 어릴 때부터 살았고 영화의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집도 아주 예쁘고 주변 경관과 집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노라가 공연하는 극단 사람들은 노라가 공황에 빠져 연극을 망치려고 하는 순간에도 다그치거나 이성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기다려준다. 잠시 등장하는 인물은 이혼 과정을 겪고 있는 중이지만, 극단 직원들은 이를 차분하게 인지하고 응원해 준다. 다들 영어를 잘한다. 하나같이 차분하고 깔끔하고 적절한 편안함을 누리면서 사는 것 같다. 수준 높은 생활 수준과 남과 비교하지 않고 차분하게 자기 삶을 사는 태도가 결합하면 그런 행복지수가 나오는 게 아닐지.
처음에는 이렇게 행복한 국가에 사는 노라가, 게다가 극단의 찬사를 받는 유능한 배우로 사회적으로도 제법 성공했는데 가정의 불화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까지 생각하는 사람이 됐다는 게 이해가 안 됐지만, 부모의 불화가 누구에게나 고통을 준다는 건 너무 당연한 얘기다. 자식을 버리고 떠나는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리 없고, 남겨진 어머니 또한 정신이 온전치 않았으니 아이들이 너무 힘들었을 것이다.
<연애 실험: 블라인드 러브>라는 넷플릭스 연애 프로그램을 보면 상당히 많은 출연자들이 부모님의 이혼으로 많은 아픔을 겪고 있다. (얼굴 안 보고 대화만 하면서 사랑을 시작하는 프로그램이라서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한다.) 부모님의 이혼뿐 아니라 아버지가 일찌감치 집을 나간 경우도 많아서 부모가 사랑으로 자녀를 키우는 경험을 해보지 못해 상처가 깊은 남녀가 많다. 그래도 자신만큼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서로 의지하면서 좋은 가정을 꾸리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그 과정에서 불행했던 가정이 상당한 걸림돌이 된다. 모든 관계 문제에 어린 시절의 가정이 영향을 준다. 처음에는 그런 불행을 방지하기 위하여 어떻게든 부부가 다정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되지 않아 상처받는 사람들이 점차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기보다는.... 화목하고 다정한 부모라는 건 환상속에나 존재하는 개념이라는 생각이 더 든다. 인간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부모도 완벽하지 않다. 그런 부모가 꾸린 가정도 결핍이 생길수밖에 없고 우리집이 추한 면이 있는 것처럼 여느 집이나 자기만의 고민이 있다. 물론 극단적인 경우도 많고 소통하려는 마음조차 닫아버려서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 가정이 주는 고통도 절대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고 그런 집이 되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는 부모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깨달을 때 가정의 상처가 아물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 같다. 악랄한 부모라면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 아니면 인간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불쌍한 인간들이다.
노라도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을까? 예고편에서 아버지는 '너희는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야'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게 전달될지...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모나고 못난 부모님 각자의 사랑을 깨닫는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