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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ileen Aug 20. 2018

운명같은 우연, 내 삶에 우연이 비집고 들어올 틈

하루 한시간 글쓰기. 어쩌다 마주친 운명같은 우연

   정신 나간 생각이라는 건 아는데
너한테 물어보지 않으면 이 생각이 평생 날 쫓아다닐거야.
 같이 비엔나에 내려서 마을을 둘러보자.

                   -<비포 선라이즈> 중에서


회사를 나오고, 무작정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나에게 새로운 시야가 필요해서? 놀고 싶어서? 그것보다는 질문을 피하기 위함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동안 짧게만 다녀왔던 '교토'를 여행지로 정했다. 평소같았으면 짧은 시간 내어 가는 휴가인만큼 숙소와 동선 하나하나에 신경쓰고 뭘 먹으면 좋을지, 어떤 가게에서 무엇을 사고 싶은지 검색하며 즐거워했을 나였겠지만

이번 여행만큼은 왠지 섬처럼 홀로 멀찍이 떨어져 쉬고 싶었다.


하지만 쉬겠노라 마음먹었던 것과 달리 막상 여행날이 다가오니 불안감이 밀려왔다.

아무리 가까워도 해외 나가는데라는 마음이 나를 또 계획으로 자꾸 밀어넣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시나리오를 읽던 시절에도 나는 '우연의 남발'을 가장 용서하지 못하는 편이기도 했다.


      뜬금없이 이 둘이 마주치는 것이 말이 돼요?

     주인공은 갑자기 왜 이런 선택을 하죠?

     계기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감정이 쌓이지 않았는데 이렇게 진행되면

     관객이 따라오기 힘들 것 같아요


인과관계에 합당해야 하고, 새로운 선택을 할 때는 반드시 연유가 있어야 했고, 다수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쪽으로 이야기를 따지고 들기 십상이었다. 내 삶에 있어서도 나는 자유분방을 표방했지만 실은 계획적인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여행도 계획적으로 준비하는 것은 물론, 만남도 미리 약속을 정하는 편이고, 업무를 할 때도 스케줄부터 짜고 시작하는 타입이었다. 결국 나는 제 버릇 개를 주지 못하고 교토 여행 동선을 짜기 시작했다.

그 동안 가지 못했던 곳들과 가고 싶었던 곳들을 하나하나 채우면서 편안함을 느꼈다.


여행을 오르는 비행기에서도 핸드폰을 내려놓지 못하고, 비행기에서 내려서 할 일들을 체크하기 바빴다. 물론 처음 갈 레스토랑은 예약이 되어있었고 필요한 바우처들도 두번씩 체크하여 가방에 넣어두었다. 예상했던 시간에 비행기에 내려, 계획한 기차 시간에 맞춰 기차를 타고 교토에 도착했다. 첫날의 일정은 계획대로 원하던 음식점에 가서 식사를 하고, 관광지와 예쁜 가게도 둘러보고 호텔에 시간맞춰 돌아와 웰컴드링크와 대욕장 서비스도 알차게 이용했다. 두번째 날도 주말인만큼 너무 유명한 곳들은 배제하고 동선 주변으로 플랜 B들까지 계획했던터라 역시나 만족스럽고 순조롭게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런데 셋째날 아침, 계획에 없던 자연재해가 들이닥쳤다. 일본에 지진이 온 것이다.

교토에 있던터라, 오사카만큼 공포가 극심하지는 않았지만 태어나서 처음 겪는 지진에 소위 멘붕이 왔다.

하필이면 가장 기대했던 곳인 '아라시야마'를 가려고 계획했던 날이었다. 별 일 없겠지라는 마음으로 교토역으로 향했는데, 웬걸 온 기차가 중단될만큼 큰 지진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있는 채 역을 배회하는 사람들부터 끝이 보이지 않는 공항버스 줄까지, 지진의 위협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오늘 하루종일 계획했던 일정이 무산된 나는 어디로 가야할 지 방황하기 시작했다.


내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좋은 쪽으로 생각해보려 무단히 애썼다.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철도청 직원에게 철도를 이용하지 않고,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물어봤다. 그는 여우신사라고 불리는 '후시미이나리'를 추천해줬다. 여기는 궁금했지만 동선에 맞지 않아 유의깊게 보지 않았던 곳이었다. 버스를 타고 얼마 가지 않아 신사에 도착했다. 신사 입구까지 재미있는 노점상들이 들어서 있었다. 여우신사의 일본스러운 풍경은 여행에 어울리는 장면들을 선사해줬다. 신사 안 쪽에 위치한 카페가 생각보다 한산해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앉아 정원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돌아가는 길목 노점상에서 군것질을 하기도 했다. 호텔에 가던 길에 보이는 음식점들 중 귀여운 초밥집에 들러 초밥을 먹으며 시원한 생맥주 한잔도 잊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온 나는 대욕장에 몸을 담그며 오늘을 곱씹었다. 우연으로 가득찬 오늘은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난 왜 모든 것을 내가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실로, 내 인생은 거의 우연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계획대로 되는 것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나의 인생계획대로라면 지금 나이 쯤에는 벌써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이자, 한 남편의 아내이자 아이의 엄마가 되었어야 했다. 지금 친구들도,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도 또한 내 꿈을 위한 시간 모두 다 수많은 우연들이 빚어낸 운명이었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 나만의 계획으로 이룬 것 없는 인생이었다. 내 인생에 비집고 들어온 우연들이 그토록 고맙고 애틋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우연히 마주친 하루의 끝자락에서, 난 내 '우연한 만남'들과 조우했다.

계획했기 때문에 빠짐없이 실행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

오히려 계획했기 때문에 나에게 다가올 운명같은 우연을 놓칠 수도 있지는 않을까?

때로 운명은 우연의 얼굴로 다가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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