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추석마다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내가 결혼하고 시가에서 처음 맞은 추석은 시집살이의 아린 맛을 절실히 느낀 날이었다. 그때의 분노는 남편과 충돌이 있을 때마다 커졌다가, 무던히 지낼 때는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10년 넘도록 살아오며 분노는 많이 누그러졌지만, 당시의 기억은 잊히질 않는다.
혼전 임신으로 번갯불에 콩 볶듯이 결혼을 하고 쌍둥이 아이들을 낳았다. 육아휴직을 내고 두 아이를 키웠다. 친정에서 백일까지 키우고 서울 집에 왔다가 너무 힘들면 친정에 가서 한두 달 살다 오곤 했다. 그즈음 가을, 서울에 머물 때였다. 추석이 바로 앞인데 두 아이 모두 감기에 걸렸다. 코가 막혀서 분유 먹는 것도 버거워했다. 토는 어찌 그리 자주 하는지 먹이고 닦이고 우는 아기들 달래어 재우느라, 정작 나는 밥 먹을 틈이 없었다. 우린 가난했고, 차가 없었다. 버스 타고 강릉 시가에 가기 힘들고, 애들이 감기로 아프니까 서울에 있자고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은 자기는 꼭 가야겠으니, 나는 가기 싫으면 애들이랑 집에 있으라고 했다. 돌도 안 된 아기들이 아파서 열이 나고 콧물이 줄줄 나오는데, 내 제안이 시가에 가기 싫은 투정쯤으로 들렸나 보다. 애들이 응급실 가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어찌하려고 나와 애들만 두고 가느냐고 따졌지만, 남편은 도리어 감기 가지고 유난 떤다며 타박했다.
시아버지는 차 없이 쌍둥이를 데려오기 어려울 거라고 보고, 경기도에서 일하는 형을 보내 우리 가족을 태워 오게 했다. 건설업에 종사하는 형은 아내와 아이는 강릉 본가에 두고, 본인은 현장을 따라 거처를 옮겼다. 젖병, 분유, 아기 옷, 체온계, 약 등을 바리바리 싸서 트렁크에 싣고 남편과 나는 아기를 하나씩 안고 뒷자리에 탔다. 서울에서 강릉까지 가는 내내, 6개월 된 아기들은 차에서 분유를 먹고 토하고, 울다 잠들길 반복했다. 잠에서 깨면 기저귀에 오줌을 누거나 똥을 쌌다. 막히는 길에서 운전하는 형도 고단했을 테지만, 뒷자리에서 한 손으로 아기를 안고 남은 손으로 분유를 타거나 기저귀를 가는 부부의 사정은 말해 무엇하랴. 다시 생각해도 울컥한다.
어렵게 도착한 시가에는 아흔 다 된 시할머니, 환갑 전의 시아버지, 손위 동서, 3살 된 시조카가 있다. 그들 중 누구도 육아를 덜어줄 사람은 없었다. 상 차리고 설거지하는 등, 손위 동서의 일을 거들어야 했다. 나는 그 집 며느리였으니까, 그래야 했다.
다음 날, 남편은 오랜만에 친구들 보겠다며 밤에 외출했다. 환경이 바뀌어서인지 잠이 들었던 딸들이 울기 시작했다. 울음소리가 사이렌보다 컸다. 둘을 번갈아 안으며 달랬다. 좁은 방에서 땀인지 눈물인지 펑펑 쏟으며 아이들을 달래자니, 누군가 방문을 쿵쿵 두들겼다. 시아버지였다. 왜 이리 시끄럽냐고 했다. 애들이 아파서 그런지 갑자기 둘 다 운다고 했다. 인상을 팍 찡그리던 시아버지는 애들 아빠는 어디 갔냐고 했고, 그 대답은 뒤이어 나온 형이 대신했다. 친구 만나러 갔다고. 남편의 형 역시 표정이 안 좋았다. 당장 전화해서 불러들이라는 시아버지의 호령에 전화를 걸었다. 남편은 친구를 만나러 가던 길을 돌아왔다. 아기들을 겨우 달래어 눕혔다. 비좁은 방에서 아기들을 가운데 두고 누웠다. 아기들을 살피며 선잠을 잤다.
당시 난 갑상샘 기능 저하증을 진단받고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지만, 그런 사정은 오직 내 개인의 문제였다. 시할머니와 시아버지를 모시며 살림을 했던 손위 동서는 다음 날 아침, 내가 늦게 일어나자 짜증이 났던가 보다. 남편에게 자기 혼자 아침을 차린다고 투덜댔다. 시어른 모시며 어린 자녀를 양육하는 동서 사정을 이해는 한다만, 그땐 난 너무 지쳐있어서 일찍 일어나지 못했다. 시아버지를 비롯하여 남편의 형네 가족은 외출을 안 하는 시할머니와 우리 가족만 빼고 아침을 먹으러 밖에 나갔다. 시할머니는 눈가가 퀭해 보이는 나를 보시더니 아침을 차려서 같이 먹자 했다. 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차린 상에서 밥을 먹는데, 밥알이 모래알 같았다.
시가 관련한 에피소드는 그 후로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쌓여 왔다. 생판 남이었다가 혼인으로 인척이 된, 며느리 혹은 동서였던 나는 그 집안 서열 맨 마지막이었다. 남편은 나를 그들에게 먹잇감으로 내주었다. 남편의 묵인, 때로는 강요 하에 내 권리가 침해됐다. 자유와 평등은 ‘유교’라는 봉건적 이념의 벽에 부딪혀 무너졌다. 시가 어른은 물론 남편을 비롯한 삼 형제마저 ‘남존여비’를 의식의 밑바닥에 둔 것처럼 행동했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요구를 거절해서는 안 되었고, 아내는 마땅히 남편의 의견에 따라야 했다.
싫은 상대는 피하면 그만이지만, 피할 수 없었다. 동서 눈치 보이니 명절 외에는 시가에 가는 것을 자제하자고 청하면, 남편은 시어른에게 불효한다며 나를 못된 며느리라고 비난했다. 동서가 시동생네 가족을 맞아서 식사를 준비하는 것을 당연한 듯이 여겼다. 남편이 형수에게나 아내에게나 시집살이를 시킨 셈이다. 시아버지는 서울에 사전 연락 없이 불시에 들르시곤 했다. 오시기 전 미리 연락을 좀 해 달고 남편을 통해 요청했지만, 말을 안 전했는지 혹은 전했어도 무시하는지 시아버지의 기습 방문은 멈추질 않았다.
시가 식구만 어려웠던 게 아니다.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사람은 남편이었다. 육아와 살림을 맡은 나는 남편에게는 그저 집에서 노는 여자였다. 남편은 걸핏하면 나도 집에서 애나 보며 쉬고 싶다고 했다. 쉬는 게 아니라는 내 하소연은 그의 귀에 닿지 않았다. 남편은 혼자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돈을 어디에 쓸지 결정하는 것은 자기 몫이라고 생각했다. 친정 부모 용돈은 못 드려도 시어머니 용돈은 꼬박꼬박 드렸다. 한 번은 남편의 형네가 이사하며 돈을 꾸어 달라고 한 적이 있다. 은행에서 신용대출을 받아 형에게 돈을 꾸어준다고 했다. 당시 우리 자산의 반 정도 되는 액수였다. 내가 반대했다. 집 명의를 동서 앞으로 하는 거니 은행에서 빌리든, 동서 친정에서 빌리든 하라고 했다. 남편이 기어이 나의 반대를 무릅쓰고 돈을 빌려주려고 해서 이혼을 선언했다. 자녀들이 아직 어렸지만, 더는 막무가내로 자기 고집대로만 살려는 남편과 함께 할 수 없었다. 이혼을 각오하고 남편과 싸웠다. 남편은 돈을 빌려주겠다는 뜻을 거두었다. 결혼 후 첫 승리였다.
남편을 비롯하여 시가와의 갈등이 단번에 해결되지는 않았다. 그 뒤로도 크고 작은 갈등을 겪었다. 불편해도 거절은 단호하게 했다. 애매하게 돌려 전달하면 내 뜻이 관철되지 않았다. 시부모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는 갈수록 줄었다. 시부모와 며느리 사이에 서로 존중하며 친목을 쌓는 관계를 원했다. 처음부터 내게 예의와 효를 가장한 복종을 바라지 않았다면 좀 더 나은 관계로 지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모든 무례한 침입과 요구를 거절한다. 사람에 대한 존중과 예의는 ‘누, 구, 나’ 지켜야 한다. 그때도 지금도 내겐 거절할 권리가 있다. 그동안 내가 참은 건, 물컹하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내 아이들 때문이었다. 애들 아빠 없이 키우는 것이 도무지 자신 없었다. 아이들을 낳고 약해진 심신으로 남편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 아이들이 자라면서 나는 달라졌다. 아이들이 단단해지자, 나도 단단해졌다. 시가에서 부당한 것을 요구하면 거절하고, 거절에도 강요한다면 행동으로 보였다. 코로나 때문에 친척 방문을 자제하던 지난 설에 남편이 본가로 친구들을 초대했다. 나보고 그들을 위해 점심을 차리라고 했다. 내 동의 따윈 구하지 않고 내린 통보였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와서 점심을 따로 먹었다. 나도 그에게 동의 따윈 구하지 않았다.
남편에 대한 불만을 늘 안고 사는 것은 아니다. 남편이 가정을 지키려고 굴욕을 참으며 돈을 버느라 애쓴 점을 인정한다. 그에게 늘 고맙다고 했다. 그러나 남편은 내게 고맙다고 하지 않았다. 이따금 내가 한 요리가 입맛에 맞아 흡족하면 가볍게 맛있다는 인사가 전부였다. 두 아이를 고생하며 키운 것을, 허튼 돈 안 쓰고 아끼며 살림한 것을 고마워하지 않았다. 그는 결혼한 이래 나를 끊임없이 비난했다. 자기 가족에게 잘하지 않는 점을, 자기에게 여가를 충분히 주지 않는 점을, 애들 크고 맞벌이하지 않는 점을(나의 경력 단절 따윈 고려하지 않았다) 비난했다. 그는 나의 가치를 훼손했다.
나는 정말 가치 없는 사람인가 자문했다. 아니다. 나는 두 아이를 키우며 살아내느라 애썼다. 아등바등 살았다. 참 많이 애썼다. 몸에 모든 에너지가 다 고갈된 느낌으로 살았다. 내가 그에게 부족했던 점은 그에게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가 아무리 나를 깎아내리려 해도 나는 나의 가치를 찾아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면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자신을 돌아봤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되뇌었다. 그렇게 내 존엄을 찾았다.
남편의 실수로 인해 사기를 당해 큰돈을 잃은 적이 있다. 그로 인한 갈등으로 두 번째 이혼 위기를 맞았다. 남편은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외면했다. 사기 정황을 파악하고 고소를 해야 했기에 그와 악착같이 싸웠다. 나는 사건 당시의 기억을 제법 정교하게 떠올렸다. 남편이 부정했던 내 기억엔 그가 범한 실수를 포함하고 있었다. 남편은 내 기억이 잘못됐다고 내가 책임을 회피하려고 기억을 조작하는 것이라고 날 비난했다. 남편 본인이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면 언제든 훗날 내 탓을 할 거 같았다. 나는 한 치도 밀릴 수 없었다. 중요한 내용을 추려서 사건 개요를 정리했다. 변호사를 구하여 고소장을 쓰고 형사 심문을 받았다. 사기꾼은 기소되었고 아직 판결 전이다.
남편은 거액 사기를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와 모든 일을 협의하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의 피해 원금은 1/3도 회복되지 않았다. 남은 돈을 회수하지 못할 수도 있다. 사기 고소를 진행하며, 우리 부부는 집을 팔고, 대출을 받아 새집을 사는 등의 일을 처리했다. 이제는 함께 의논해서 일을 처리한다.
나는 이따금 내가 좀 더 강하고 당당했다면 어땠을지 생각한다. 처음부터 노련한 싸움꾼이었다면, 한때나마 그는 물론 그의 가족까지 미워하던 시절은 없었을 것 같다. 억울한 것이 없으면 증오도 없다. 미워할 여지를 두지 않도록 끝까지 싸워 이겼다면? 내 존엄과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지난날을 돌아보면, 그땐 내게 싸울 힘이 없었다. 어린 자식들이 걸렸던 점도 있지만, 나 자신이 약했다. 아이들을 키우며 심신의 에너지를 퍼 쓰기만 했지, 채우질 못했다. 남편의 공격에 턱없이 무너졌다. 그에게 의존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이제 많이 먹는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등의 여가 생활을 누린다. 심신에 에너지를 채운다. 경제적인 능력은 여전히 없지만, 필요하면 궂은일이라도 할 용기가 있다. 삶의 고난을 겪으며 맷집이 생겼다. 나는 이제 울지 않는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정면을 주시한다. 거절할 땐 거절하고, 싸워야 할 땐 싸운다. 분노는 나를 사로잡지 않았다. 나는 분노를 이용했다. 나는 내 권리가 존중되지 않을 때, 내 존엄이 무시될 때 분노한다. 분노는 나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