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의 사생활
아이들 학교 열린 게 대단하긴 한가보다. 여전히 어른들은 재택근무여도, 아이가 학교를 가니 일상이 어느 정도 회복된 느낌이다. 델타 변이 따위는 여전히 기승이지만. 어째 이 동네는 백신 맞은 어른들은 집에 콕 박혀 일하고, 백신 없는 12세 미만 아이들은 열심히 사회생활 중이다. 어쨌든, 아이는 신이 났다. 강아지마냥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서 온 집안을 돌아다닌다. 없는 꼬리도 내 눈엔 보인다. 나는 늘 아침잠이 많아서 일어나 나가기 급급했는데, 아이는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옷도 자기가 골라 귀여운 거 말고 '쿨'한 거 입고, 동생도 데리고 놀고, 엄마가 싸는 도시락에 '딸기도 넣어주세요' 참견하고, 온갖 것을 다 한다. 이 모든 게 오랜만에 학교 나가는 게 즐거워서인듯해서, 괜히 마음이 한켠이 몽글몽글하다.
부근 회사가 거의 재택이라 그런가, 아빠 픽업이 90%를 육박하는 신기한 현상이다. 교실은 여전히 구경도 못해봤고, 학부모를 초대해서 선생님이 이것저것 안내해주는 Back To School Night 역시 zoom으로 진행되었다. 좋은 점도 있다. 마스크, 모자 쓰고 나가니 무려 1분 만에 외출 준비 완료. 또 아빠들이 많으니 대부분 띄엄띄엄 떨어져서 조용히 폰만 들여다보다 애들 데리고 간다. 뭔가 깔끔하다. 썰렁한 풍경이 아쉽기도 하고, 스몰 토크 안 해도 되니 편하기도 하다.
아이반은 17명이다. 그런데 그중에 남자아이는 7명밖에 안 된단다. 나는 어릴 때 한 교실에 40명 중 마음 맞는 친구는 겨우 두세명, 많아봤자 네다섯 정도였는데. 17명, 그중 동성은 7명뿐인데 마음 맞는 친구를 사귀는 게 쉽기나 할까. 아직 초등 저학년이니 두루두루 잘 놀긴 하겠지. 내가 이런 소리하면, 남편은 남자애들은 공하나 던져주면 다 잘 놀아. 한다. 으이그, 남편님아. 그건 당신 아들이 농구를 잘할 때 이야기지. 한국 친구들 이야기 들어보면 교육열이 영어유치원부터 시작된다던데, 미국 애들은 그렇게 운동에 진심이다. 정말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온 가족이 모여 주말이면 야구, 농구, 축구시키러 난리도 아니다. 들여다보면, 꼬마들 축구교실에 아빠들 입김도 장난이 아니다. 누가 코치를 하고, 누가 감독을 하고. 구경하노라면, 그 순간만큼은 사회에서 어떤 지위에 있는지, 나이가 어떤지 다 사라지고 '한때' 축구인들만 존재한다. 한동안 코로나 이후 축구교실도 쉬었는데, 주말에는 애를 데리고 나가서 공놀이를 좀 해줘야 할 것 같다. (나 말고 아빠가)
그건 그렇고, 오늘은 잘 보냈을까. 요새 한창 농구를 하던데, 우리 애가 좀 할 줄은 아는 걸까. 궁금한 게 많아 이것저것 묻다 보면, 내가 아이를 취조하는 것만 같다. 아이를 믿는 느긋한 엄마가 되겠다며, 오늘은 물어보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엄마들은 다 아는 이 어려운 결심을 하는 즈음, 아이가 저쪽에서 소리치며 뛰어온다.
"엄마, 오늘은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
읭?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내게 달려와 안기는 아이에게 선방을 제대로 맞았다. 당황해할 겨를도 없이 아이가 덧붙인다.
"나는 오늘은 아무 기억이 안 나요! 앞으로도 안 날 계획이에요!"
읭? 게다가 뛰어서 먼저 가버린다. 뭐지?
아.무.것.도.묻.지.마.세.요!
와... 저 말을 벌써 듣다니. 심지어 앞으로도 기억이 안 날 계획이라니.
와... 나 아직 마음의 준비 안 되었는데. 만 7살인데. 언니들이, 친구들이, 선배 부모들이 아직은 귀여울 때 맞다고 했는데. 아들 키우면 참는 연습을 해야 한다더니, 이제 시작인 건가. 하아.
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저러나. 뭔 일이 있긴 한 거다. 아이 표정을 보니, 잘 놀다 온 건 분명한데. 눈빛이 단호한 게, 이건 물어봤자 나만 손해 보는 게임이다. 꾹 참는다. 일단 엄마 촉이 나쁜 일은 아닌 거 같으니. 그렇지만 궁금해서 다른 일도 손에 잘 안 잡힌다. (이 와중에 남편은 정말 하나도 안 궁금해했다는 게 더 신기)
밤이 깜깜해졌다. 하루를 마감하려는 순간, 아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엄마, 비밀 잘 지킬 수 있어요?"
"응, 그럼!"
"엄마, 오늘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헌터(*아이 요청에 따라 가명)가 바지에 쉬했어."
"정말? 걔 당황했겠다. 그래서 어쨌어?"
"내가 걔 앞에 앉아 있었지."
이게 일의 전모였던 거다. 친구가 바지에 쉬를 하고 벤치에 앉아있었단다. 민망하니 못 일어나고 있는데, 그걸 발견한 내 아이가 앞에 가서 앉아서 가려(?) 주면서 둘이 도란도란 이 난관을 헤쳐가려고 했단다. 그 뒤가 사뭇 진지하다. 여벌 옷도 없는 아이 둘은 어떻게 다른 아이들에게 안 들킬까 머리를 싸맸다. 전달해주는 톤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른다. (요건 귀여워서 영어 그대로 옮깁니다.)
아들: "So, what are you going to do now?"
친구: "I will pour water on my pants. So others will think its just water. That's the only way."
아들: "You know? It's smelly now. But don't worry. I will bring you water."
이래서 아이가 물통에 물을 가득 받아 와서, 친구 바지 위에 시원하게 뿌렸다는 이야기다. 다행히 뜨거운 햇살이 아이들 편이어서 금방 말랐단다. 냄새는 좀 났지만. 나는 이야기 전말을 다 듣고 나서 귀엽기도 하고, 그 아이는 얼마나 당황했을까, 바지에 물을 붓겠다는 기지에 웃음도 나오고, 친구 마음 헤아린 아이가 기특하기도 하고 그랬다. 친구의 Privacy이기 때문에 엄마한테도 말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생각해보니 Family comes first라면서. 이건 가족이어서 말해준 거란다. 다짐도 받고, 새끼손가락도 걸고 나서야 아이는 안심하고 꿈나라로 갔다. (이곳에는 이름을 바꿔서 올리는 건 된단다. 고민을 하더니, 친구는 Hunter, 자기는 Nate로 하란다. 아무래도 아이들 보는 책 <Nate the Great>에서 따온 것 같다.)
살다 보면 실수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내 실수를 덮어주는 사람을 만나기도, 더러는 더 후벼 파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어쩔 때는, 실수 자체는 별 거 아닌데 상대의 반응에 따라 내 실수가 훌훌 털 수 있는 일이 되기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수치로 남기도 한다. 직장에서 한 실수라고 한다면, 생각만 해도 긴장과 피로가 휘몰아친다. 우리는 남들에게 책잡히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쓰며 피곤하게 살아가는가.
이쯤 되니, 둘이 머리를 맞대 고민하다 물을 붓고 한참을 킥킥 웃었다는 게 얼마나 유연한 대처인지 놀라울 정도다. 아이들의 기지가 기특하고, 우정이 아름답다. 최소한 헌터에게 이 일은 트라우마는커녕, 훌훌 털 수 있는 웃음 한 조각되었을 테다. 내 아이에게도 칭찬을 꼭 해줘야겠다. 상대가 무안할까 봐 감싸주고 같이 해결하려는 마음. 친구 바지에 물을 붓는 마음. 그런 것을 아이는 언제 배웠을까.
아이들은 우리 몰래 잘도 자란다.
우리는 매일 같이 있는데, 언제 그렇게 자라는 걸까.
2021년 가을. 팬데믹은 여전한데, 잠든 아이의 키도 훌쩍 자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