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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미남 Aug 07. 2023

#011화 @군가를 외워야 합니까

  군가란 무엇인가.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군대에서 부대 내 훈육이나 동질감 형성, 사기 고양의 목적을 지니고 만들어 부르는 곡’이라고 나온다. 아직도 내 머릿속에 군가가 맴도는 것을 보면, 군대에서 군가의 영향력은 정말 엄청나다고 생각한다.     


  군가의 역할을 몇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노동요다. 노동요는 말 그대로 ‘일을 할 때 부르는 민요’를 뜻하는데, 군가는 다양한 상황에서 노동요 역할을 톡톡히 했다. 매일 아침 웃통을 까고 연병장을 뛰는 ‘알통 구보(왜 알통이라고 표현했는지 지금도 모르겠지만)’ 시간에도 소대를 인솔하는 선임의 선창에 따라 우리는 미친 듯이 군가를 부르면서 구보를 뛰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구보 중에 군가, 군가는 ‘전우’. 하나, 둘, 하나, 둘, 셋, 넷!” 하면 바로 ‘전우’를 뛰면서 불러야 하는 식이다. “겨레의 늠름한 아들로 태어나! 조국! 을! 지키는! 보람찬 길에서! 우리는 젊음을 함께 사르며(쉬고) 깨끗! 이! 피고 진! 무궁화꽃이다!” 보통 구보를 하며 부르는 군가는 ‘음정’이 중요하지 않다. 음치라도 상관없다. 고득점의 포인트는 ‘얼마나 큰 목소리로 부르는가’에 있다. 부르는 중간에 가사를 실수하거나 목소리가 작으면 그날은 어김없이 내리 갈굼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고로 음정은 확실치 않더라도 군가의 가사를 외우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둘째, 전투력 향상이다. 군가는 때로는 훈련 중 병사들의 전투력을 높여주는 일에 일조했다. 행군이 길어지는 날에는 발이 평발이든 아니든, 대체로 지치기 마련이다. 이때 한 선임이 군가를 부르자고 한다. “행군 중에 군가! 군가! 군가는 멸공의 횃불! 하나, 둘, 하나, 둘, 셋, 넷!” 하면 뒤에 따라가는 모든 병사가 “아름다운 이 강산을~ 지키는 우리~” 하고 군가를 부른다. 마치 초등학생들이 현장체험학습 때 담임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다 같이 동요를 부르며 걸어가는 모습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짝꿍 손을 잡고 걸어가는 대신 무거운 군장과 총을 메고 열을 맞춰 걸어가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할까. 정말 신기하게도 걸걸한 목소리로 다 함께 같은 군가를 부르고 있노라면 없던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셋째, 갈굼의 근거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군가의 세 번째 역할이 가장 안타까운데, 군가는 선임이 후임들을 갈구기에 아주 좋은 요소들로 가득하다. 예를 들어 선임이 후임의 어깨를 쿡 찌르면서 “전우”라고 얘기하면 후임은 바로 군가 ‘전우’를 불러야만 한다. 그리고 한참 부르다가 중간에 다시 쿡 찌르면서 ‘전선을 간다’라고 말하면 바로 그 군가를 시작해야 한다.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새로운 노래를 약 3초 안에 전환해서 부를 수 있을 정도가 돼야 한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도 꽤 잔인한 부조리였다. 익숙한 노래도 중간에 갑자기 다른 노래를 부르라고 하면 대체 누가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겠는가. 물론 가사가 틀린다거나 전혀 다른 군가를 부르게 되면 맞선임부터 시작해서 내리 갈굼이 시작되었다.     


  이등병에게 군가가 어려운 첫 번째 이유는 ‘군가의 수많은 종류’에 있다. 솔직히 어떤 노래의 가사를 ‘정확히’ 암기하는 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의 곡일지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가사를 보며 계속해서 듣고, 반복해서 따라 부르는 절대적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군대에서 주어지는 것은 달랑 ‘군가 수첩’ 하나. 심지어 군가를 가르쳐주는 선임들도 모두 실용음악과 선배들이 아닌지라, 가르쳐 주는 선임 하나하나 모두 박자와 음정이 다르니 환장한다. 이런 지옥의 난이도에서 수많은 종류의 군가를 모두 외워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도 단 며칠 만에.


  군가가 어려운 두 번째 이유는 ‘문학 작품 같은 가사’에 있다. 예를 들어 ‘전선을 간다’라는 곡의 가사를 살펴보자.


1.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

눈 내린 전선을 우리는 간다

젊은 넋 숨져간 그때 그 자리

상처 입은 노송은 말을 잊었네     

2. 푸른 숲 맑은 물 숨 쉬는 산하

봄이 온 전선을 우리는 간다

젊은 피 스며든 그때 그 자리

이끼 낀 바위는 말을 잊었네     

후렴 : 전우여 들리는가 그 성난 목소리

전우여 보이는가 한 맺힌 눈동자


  ‘적막한 산하, 눈 내린 전선, 상처 입은 노송, 맑은 물 숨 쉬는 산하’ 등의 문장은 흡사 중고등학교 때 배웠던 문학 작품들을 연상시킨다. 만약 노래가 아니라 생각하고 읽으면 시 한 편을 읽는 기분도 든다. 평소에 발라드나 힙합의 직설적인 가사에 더 익숙했던 병사들에게, 시의 한 부분을 노래로 승화시킨 ‘군가’라는 새로운 장르는 더욱 낯설기만 하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군가를 외우는 강압적인 분위기’에 있다. 군가를 가르쳐주는 선임들이 한결같이 친절할 수는 없다. 때로는 세심하게 음정까지 잡아주고, 틀려도 웃으면서 가르쳐주는 서글서글한 선임도 있었다. 하지만 틀릴 때마다 욕을 하고, 이것도 외우지 못하는 폐급이냐며 심리적으로 압박을 가해오는 선임들도 있다. 심지어 내 후임이 나보다 더 빨리 군가를 외워서 비교당하게 되는 일도 있다. 이런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정신을 부여잡고 군가를 외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슈퍼스타K>라는 프로그램을 보며, 왜 지원자들이 자신이 모르는 미션곡을 외울 때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막상 경연에서 가사 실수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은 하루라는 시간이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해 암기가 어려웠을 것 같다.     


  나 역시 이등병 시절 군가를 빠르게 외우지 못해서 초반에 꽤 많은 갈굼에 시달린 기억이 있다. 이발실 같은 곳에 가서 선임에게 배우고, 후임들과 연습했던 기억.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훈련 중에, 또 작업을 하는 중에 수시로 군가를 불러야만 하는 상황이 찾아왔다. 그래도 내가 실수 없이 잘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였기에, 정말 틈날 때마다 군가 수첩을 보며 군가를 외웠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모든 군가의 가사를 귀신같이 외우게 되자, 선임들은 더 이상 나를 군가로 괴롭히지 않았다. 무언가를 잘하게 되면 괴롭히고 싶은 마음도 사라지는 게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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