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음사 2020.06.03
글-맛: 글이 가지는 독특한 운치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
젊은작가상 수상집을 읽다 윤리에 대한 내용을 접했는데, 관심이 가서 관련된 책을 찾다 발견한 신간이다.
평론집 치곤 제목이 인문학적이라 끌렸다.
현실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가 우리가 아는 현실과 다르다는 것에서 오는 윤리적 혼란이 문제가 된다. 해석 불가능성이 아니라 이해 불가능성이 지배할 때 주체는 윤리로부터의 응답 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기에 궁핍한 주체가 된다. 죄책감과 책임감이 모두 주체에게만 머무를 때 사회의 유죄성과 폭력성은 더욱 커지는 것이다.
-p29
이 책은 단번에 이해하긴 어려운 내용들이 많았다. 윤리의 윤리를 말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위의 문장처럼 윤리가 어떻게 개인에게 혼란을 주는지 다양한 사례를 펼치기 때문이다.
살고 있는 현실이 알고 있는 현실과 다르다는 혼란과 분열은 궁핍을 넘어선 완전한 고립을 야기하고, 사회를 지탱하는 다양한 법과 질서를 빠르게 무력화시키는 것 같다.
'다시 시도하기, 다시 실패하기, 다시 더 잘 실패하기, 아니면 더 나쁜 게 나을지도, 더 나쁘게 다시 실패하기, 좀 더 나쁘게 다시.' 이 말에는 실패와 성공 혹은 나쁨과 좋음의 이분법을 파괴하는 모순 어법들이 가득하다. 실패 자체가 성공일 수 있고, 성공한 실패 자체가 더 좋은 성공일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p59
굿과 배드의 이분법을 파괴하는 게 살아생전에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실패 자체가 성공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동의 한 표는 던지고 싶다.
경계는 벽이 아니라 문턱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상은 경계 없는 세계여서는 안되며, 모든 경계가 인정되고 존중되며 침투 가능한 세계여야 한다.
-p145
작가의 확고한 문체가 뾰족하고도 분명하게 다가온다. 문턱은 양쪽을 넘나들 수 있다, 경계에 대한 시야가 넓어진다.
어머니들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모성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구성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모성의 '수행성(performativity) 개념이다. 어차피 모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제도와 규범이 만든 이차적 구성물에 불과하다면, 그래서 원본과 복사본의 구분이 불가능하다면, 구체적인 행위 속에서 모성을 어떻게 구성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p245
나도 모성을 신성화했었고, 그것이 사회로부터 배운 개념인 걸 알고부턴 다시 재구성했던 때가 있다. 모성만큼 전통과 보수적일 것을 요구하는 감정이 있을까. 구분하지 않으면 계속 바람을 맞다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다시 젊어짐'으로써 가 아니라 '새롭게 늙어 감'으로써 진정한 망명의 양식을 구현하는 것이다. 노년 문학 속 노인이란 '오래 산 사람'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의 다른 이름이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p269
늘 새롭게.라는 문장이 다소 허황될지라도, 살아감에 있어서 중요한 가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앞으로 새롭게 나아가는 것. 완전히 다르게 변한 다기 보다, 조금씩 다른 생각과 선택을 하는 것. 그거야말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않을까.
사랑에 있어서도 동감은 위험하다. 나와 같지 않으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타인이자 적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와 분리되지 않는 연인에 대한 사랑은 나르시시즘에 불과하다.
-p364
책에선 동감과 공감의 태도 차이를 분명하게 서술한다. 특히 사랑에선 분리를 강조했다. 분리의 기준도 각자마다 다르니 연인이라면 서로 대화로 알아가는 것도 관계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작가는 다양한 한국문학의 내용을 예로 들면서 윤리를 비틀고 다시 정립한다. 처음엔 생소한 내용이라 좀 어려웠는데, 소설을 예로 드니 이해가 잘되고 윤리에 대해 무지했다 싶더라.
단박에 호흡하듯 읽기보단, 한 챕터를 읽고 자신의 개념을 짚어보는 식으로 보면 좋을 것 같다. 필사도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