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글ㅡ맛

글-맛:에세이스트의 책상/배수아

2003.12.29/(주)문학동네

by grim jari
글-맛: 글이 가지는 독특한 운치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

최근에 그림자의 빛에 나온 책을 2권 읽었다. 구의 증명을 절절하게 읽은 후라 에세이스트의 책상은 어떨까 싶었는데, 내용이 앞쪽보단 후반으로 갈수록 몰입도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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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빈곤과 경박함은 곧 죽음과 다를 것이 없다. 이것은 M의 생각이었다. 진지한 시선이 결여된 정신은 부패하는 고기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실제로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나기에 앞서서 추상적인 개념으로 우리 삶의 내용을 포괄적으로 점유한다는 것이다.
-p69


진지한 시선이 결여된 정신이 즉 정신적 빈곤이고 죽음이라면, 나 역시 살아있지 않을 때가 많은 것 같다. 그래, 그런 느낌에 묶인다 싶을 땐 종이를 펴고 펜을 꼭 잡고 그것을 적는다. 지금이 어떤 상태인지 면밀히 짚어봐야 하는 때다. 그 행위로 정서적 죽음에서 벗어나는 게 내가 살아가는 방식일지도.



절대적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을 만났을 때, 그것은 대개 죽음이라고 불리며, 그 장소는 방향을 분간할 수조차 없이 황량한 곳이며, 이름 없는 존재로 수용되는 것이며, 수백만 중의 결코 구별되지 않는 하나로 소멸하는 경우이며, 혹은 설사 아주 다른 이름으로 불리더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최소한 죽음과 아주 닮은 어떤 것이 된다.
-p75


삶의 환희나 경이로움-기쁨-아름다움-감사함 등이 활자나 배우들이 연기하는 영상으로만 보이고 읽힐 때도, 육체는 움직이지만 존재는 황량하게 소멸되고 있다. 살아있음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 되는 것은 지옥과 같다.



나는 자신을 위한 한마디의 위안이나 변명의 말도 찾지 못했다. M의 그림자 하나, M의 목소리 하나까지도 독점하고 싶은 갈증에 시달릴 때, 사랑은 곧 지옥이 될 것이다. M은 그런 식으로 나에게 고통을 줄 수 있었다. M은, M은 마침내 그것을 발견한 것이다.
-p133


에세이스트는 M을 사랑하고 동경하는 동시에 독점을 욕망한다. 상대가 그 과정을 결국 알아챔으로써 고통이 생기지만, 그것이 없는 사랑이 가능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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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내가 괴로웠던 것은 내가 수치를 느낀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고, 수치를 느끼는 자신을 너무나 잘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바로 그 날카로운 수치로 인해서, 동시에 내가 수치를 느낄 수밖에 없는 그 사실을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p134


에세이스트의 지인이 M과 과거에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수치심의 늪에 생각이 묶여버린다. 수치심에는 독점욕, 질투심과 같은 온갖 탁한 감정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M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다.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일이 이토록 복잡하다.


결국 '나'가 지향하는 독립적인 개체성이란, '나'의 유일무이한 정신적 고유성을 침범하는 바깥의 모든 타자와 일상적, 사회적 관계의 그물망을 배척하고 나아가 혐오함으로써 부조되는 무엇이다. 개체성에 대한 '나'의 거듭된 강조가 강한 배타적, 폐쇄적 나르시시즘의 색채를 띠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p188


전반적인 내용이 시공간을 이동해서, 뒤늦게 흐름을 파악하거나 앞장을 다시 읽기도 했는데- 위의 해설 내용이 스토리 이해에 큰 도움이 됐다.

마치 주인공이 에세이스트이자 배수아 작가 같고, 그녀가 원하는 '나'의 고유성을 위해 어떤 움직임을 취하는지 느껴졌다.

소설이라기엔 에세이 같은, 허구라기엔 신랄한 현실 같은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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