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글ㅡ맛

글-맛:이제야 언니에게/최진영

(주)창비/ 2019.09.20

by grim jari
글-맛: 글이 가지는 독특한 운치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


구의 증명을 읽고 나서 최진영 작가 책을 다 검색했다. 그중 대여가 가능한 책부터 골라 바로 펼쳤다. 예상대로 '이제야 언니에게' 역시 한 번에 다 읽을 만큼 몰입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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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무서워하고 그럴 성격 같지가 않다니까. 진짜 그런 일 겪은 애들은 이렇게 경찰서까지 찾아오지도 못해. 혼자 병원 갈 엄두도 못 내. 아무것도 못하고 방에만 처박혀 있다가 미쳐버리고 말지 학생처럼 이렇게는 못해. 제야는 생각했다. 방에만 처박혀 있다가 미쳐버리는 자기를.
-p116


어째서 내가 의심받는가. 어째서 내가 증거를 대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설명해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사라져야 하나.
-p133


책은 2019년에 출간했지만, 성범죄를 당한 여성이 겪는 현실은 2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성범죄를 당하면 경찰서에 신고하고, 보호와 처벌 조치를 요구하는 게 당연하니- 제야는 제대로 행동한다. 자신이 당한 폭력을 어른들에게 분명히 표명하지만 범인이 주변 평판 좋은 친척 당숙이고, 당시의 혼란함과 닥칠 보복을 먼저 두려워하느라 완전히 거부하지 못했음을 '동의'로 해석하는 어른들 때문에, 제야는 자신이 그곳에서 사라져야 함을 느낀다.


비록 소설이지만 너무나 현실 같았다. 답답함을 숨길 수 없고 분노를 참을 이유도 모르겠더라. 제야는 미성년자다. 아니, 성인이래도 제야만큼 행동할 수 있었을까. 신고를 말리는 부모를 뒤로하고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소리 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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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해야 해. 이모가 단호하게 말했다. 사람은 노력해야 해. 소중한 존재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래야 해.
노력은 힘든 거잖아요. 제야가 중얼거렸다. 마음을 쓰는 거야. 억지로 하는 게 아니야. 좋은 것을 위해 애를 쓰는 거지.
-p161


결국 제야는 살던 곳을 떠나 엄마의 친구 이모네서 살기로 한다. 회복이 필요한 제야에게 이모는 안정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 사람은 좋아하는 존재나 좋은 것을 위해 노력한다는 이모의 말은, 제야가 이모에겐 소중한 존재라는 걸 일깨워 주는 것 같다. 소중하니까 살아야 한다는 뜻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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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한 사람은 그다. 그는 분명 그러지 않을 수 있었고,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저주스럽다. 그를 생각하고 그날을 생각하고 어떻게든 내 잘못을 찾아내려는 내가, 그의 친절과 다정함을 아는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라고 생각하는 내가, 술 때문이었을까 의심하는 내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다른 이유를 찾으려는 내가 저주스럽다.
-p216


여행하는 동안 깨달았어. 나조차 그들의 시선으로 나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판단할 때가 많다는 걸. 무슨 뜻인지 알겠니? 나를 의심하는 사람들의 말이 쌓일수록 나는 나를 의심하게 되었어. 내가 그럴만한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나를 몰아세웠어. 내가 겪은 사건만큼 나란 존재 자체가 너무 끔찍했지. 끔찍한 나는 그런 일을 당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잖아, 그 일 이전에는 나는 나를 끔찍해하지 않았어. 원인과 결과가 자꾸 역전되는 거야.
-p223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어떤 사건과 상처 든 간에 스스로 재해석하고 사실만을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성범죄는 그게 가능한가 싶었다.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백한데도 제야는 끝없는 자책과 환멸 속에 헤맨다. 그날을 찢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안일했던 너의 잘못이 아니라, 완전한 나의 잘못이라고 말해주는 어른이 있었다면 그날의 책임이 제야를 짓누르는 일은 없었겠지.


자신도 애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하는 최진영 작가의 애씀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구의 증명처럼 재밌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느낌만 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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