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글ㅡ맛

글-맛:구의 증명/최진영

(주)은행나무 / 2015.03.24

by grim jari
글-맛: 글이 가지는 독특한 운치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


구의 증명은 제목은 몇 번 들었지만, 줄거리가 사람을 먹는 내용이라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호기심도 갔지만, 다소 갸우뚱하던 과정을 거쳐 읽게 됐는데- 안 읽었음 정말 후회할 뻔...

1627914926703.jpg


이모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 대답이나 설명보다 시간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고. 더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데 지금 이해할 수 없다고 묻고 또 물어봤자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모르는 건 죄가 아닌데 기다리지 못하는 건 죄가 되기도 한다고. 이 역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대들었다.
-p23



위문장을 곰곰이 되뇌어보면, 몰라서 후회했던 적보다 기다리지 못해 후회했던 일이 가슴에 더 남았더라. 주인공 담과 구 역시 무언갈 알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 많고, 나 역시 그들의 삶을 원인과 결과로 분명히 설명하기 어려웠다. 담이 이모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듯, 삶은 머리로 완전히 이해되는 일만 일어나지 않으니까.


담은 나쁜 애가 아닌데. 담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 담이와 보내는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 담이 하는 것은 나도 하고 싶었고, 담이 가는 곳에는 나도 가고 싶었다. 나쁘지도 올바르지도 않은 채로, 누가 누구보다 더 좋은 사람이다 그런 것 없이 같이 있고 싶었다.
-p30


20대까지 분명한 형체가 있었던 사랑이 시간이 갈수록 어디론가 흘러가버린 느낌이었다. 내 손을 떠난 게 옛사랑인지 옛사람인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이 책은 소설이고 허구지만, 구와 담의 사랑은 애잔한 여운으로 가슴에 번진다. 이런 느낌, 이런 사랑해본 적 있었지- 하며 그 시절을 환기시키고, 순식간에 과거로 시선을 돌려버린다. 나쁘지도 올바르지도 않은 적이 언제였는지 잊은 줄 알았는데, 아직 다 흘러간 건 아니었나 보다.


가진 건 몸뚱이 하나 아니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부모님 입에서도 그 말이 나왔었고, 돈을 빌려준 자들 입에서도 나온 말이었다. 몸뚱이.. 몸은 인격이 아니었다. 사람이라는 고기, 사람이라는 물건, 사람이라는 도구 돈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영혼 값은 달랐다. 돈 없는 자의 영혼을 깎는 것을 사람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없으므로 깎이고 깎인 그것을 채우기 위해 돈에 매달리고, 매달리다 보면 더욱 깎이고.. 뭔가 이상하지만, 그랬다.
-p144


할 수만 있다면 구와 담을 구해주고 싶었다. 그들의 운명이 돈에 의해, 사람에 의해 해체되지 않기를 바랐다. 얇은 책 한 권이 깊은 몰입감으로 갖가지 감정을 일으켰다. 한 호흡으로 읽을 만큼 책을 놓기가 힘들었다.

구의 증명은 단순히 재밌다고 표현하기엔 구와 담에게 미안한 무언가가 있다. 책 속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이 있을 것만 같아서. 나는 너무 모르고 잘 사는 것 같아서. 그래서인지 마지막 장을 덮고도 머릿속에 그들의 이야기가 맴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