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글ㅡ맛

글-맛:얼어붙은 여자(아니 에르노)

2021.02.25 / 레모

by grim jari
글-맛: 글이 가지는 독특한 운치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


얼어붙은 여자는 강릉 이스트 씨네 책방에서 구입한 책이다. 제목보다 '여성의 삶을 쓰다'라는 띠지의 문구에 더 눈이 갔고, 자유를 다시 찾기 위해 이 책을 썼다는 설명글에 마음을 뺏겼다. 자유를 찾았다는 글보다 찾기 위해 썼다는 게 더 솔직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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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누군가는 내게 거침없이 말한다. “너는 결혼 안 하고 늙을 작정이냐!” 은밀한 압력. 나는 혼자 사는 여자가 아니라, 아직 결혼하지 않은 불확실한 존재다. 사람들은 처녀와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른다.
-p163


나이가 들었음에도 미혼인 것이 미래의 불확실함과 연관되는구나. 미혼은 만남의 가능성이 다분한 입장이다 싶었는데, 한국이든 외국이든 미혼이 주는 역할의 애매함은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나.


결혼하면, 제자리를 맴돌고, 수많은 질문을 해대는 부질없는 나로부터 해방되리라 확신한다. 균형을 이루리라, 건장한 어깨, 현실적이고, 온갖 골치 아픈 생각을 없애주는 남자와 결혼하면 삶이 안정될 거야, 심지어 네 여드름도 사라질 거야, 나는 마지못해 웃으면서, 막연히 믿는다, 결혼, ‘완성’, 나는 동의한다.
-p173


결혼으로 안정되는 점은, 더 이상 만남과 이별로 인한 감정, 시간 소모가 없다는 것뿐인데도 그것을 '완성'이라고 동의하고 믿어버리는 신념은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혼자 살다 죽는 것이, 둘이 살다 죽는 것과 뭐가 다르고 어느 것이 완성이고 미완성이라 규정지을 수 있을까. 이럴 땐 이상해진다, 삶에는 분명 정답이 없는 것 같은데 결코 변하지 않는 정답도 있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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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경쾌한 목소리, 자연스러운 문장이 들려온다. “리츠에서 베르크만의 마지막 작품이 상연된대.” 또 다른 문장이 들려온다. “내가 오늘 오후에 거기에 가면 당신 화낼 거야?” 내가 침묵하니까, 마지막 문장이 들린다. “아이 보는데 두 명이 있을 필요가 있을까?” 나는 주저앉지도 고함치지도 않았다. 냉소적이고 논리적인 결론, 이게 결혼이다. 둘 중 어느 한 명의 우울을 택하는 것, 둘이 함께하는 것은 낭비다. 내 자리는 아이 곁이고 그의 자리는 영화관이며, 그 반대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당연했다.
-p231
나를 옭아매는 것들에 대한 적개심과 절망, 끝없는 자기 연민과 자아 찾기도 마찬가지다. 비슷한 경험은 힘이 세다. 그리고 마음을 흔든다.
-p253


한동안, 가정 속 당연한 여자의 희생에 대한 시선이 확장된 적이 있다. 할머니, 엄마, 혹은 드라마 속 현모양처에서 영향받았는지, 몸에 배어있는 여자의 역할을 행동하는 내 모습도 거슬렸다. 순응하고 그 입장을 고수하다 보면, 자연스레 성에 대한 적개심과 자기 연민은 배로 커진다. 결국 병드는 건 희생자 쪽이다.

책의 주인공처럼 자유를 다시 찾기 위해 노력하는 선택을 해야만, 행동할 수 있고 요구할 수 있다. 비난을 듣더라도, 심플한 그 선택만이 결혼의 희생자를 낳지 않는 방법인 것 같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지만, 다 바뀐 건 아닐 테니 말이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여성이 어떻게 얼어붙어 살아가는지 아주 세심하고 긴 호흡으로 서술했다. 챕터가 없어서 약간 숨이 찬다는 기분도 드는데 한자리에서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느낌도 준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세상의 관념에 대해 짚어볼 만한 내용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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