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06.20 / (주) 문예출판사
글-맛: 글이 가지는 독특한 운치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
두 분의 지인이 같은 날 추천해 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제목의 '기술'이라는 단어에 의심이 찌푸러졌지만, 추천에 이유가 있으려니 싶어 주문해 읽었다. 생각보다 표지가 사랑 사랑한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단순한 듯하지만 사실은 매우 애매하고 복잡하다.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오해는 준다는 것은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 빼앗기는 것, 희생하는 것이라는 오해다. 성격상 받아들이고 착취하고 혹은 저장하는 것을 지향하는 단계를 넘어서지 못한 사람은 ‘준다’고 하는 행위를 이러한 방식으로 경험한다, 그에게는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하는 것은 사기당하는 것이다.
-p40
준다고 하는 행위 자체에서 나는 나의 힘, 나의 부, 나의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경험하고 나는 매우 큰 환희를 느낀다. 나는 나 자신을 넘쳐흐르고 소비하고 생동하는 자로서, 따라서 즐거운 자로서 경험한다. 주는 것은 박탈 당하는 것이 아니라 준다고 하는 행위에는 나의 활동성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p41
내가 뭐든 받는 것보다 주는 게 마음 편했던 이유는, 타인의 호의가 언젠간 갚아야 할 빚으로 봤기 때문이다. 사랑이 즐거운 경험인 건 분명할지라도, 제대로 받는 법을 모르니 그저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는 선에서 보답을 사랑인 듯 흉내 냈을지도. 무조건 주는 사랑 뒤엔 희생, 의미 없음이란 관념이 따라붙어 마음껏 행위 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러한 개념에서 중요한 강조점은 참아낼 수 없는 고독감으로부터 벗어날 안식처를 찾아낸다. 사람들은 ‘사랑’에서 마침내 고독으로부터 벗어날 안식처를 찾아낸다. 사람들은 세계에 대항하는 두 사람 사이의 동맹을 형성하고, ‘두 사람만의’ 이기주의는 사랑과 친밀함으로 오해된다.
-p122
신경증적 사랑의 또 하나의 형태는 자기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고 그 대신에 ‘사랑하는’ 사람의 결함이나 결점에 관여하려고 ‘투사적 메커니즘’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개인은 집단, 민족 또는 종교와 매우 흡사한 행동을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사소한 결점까지도 낱낱이 비판하고 자기 자신의 결점을 천연덕스럽게 무시해버린다. 항상 다른 사람들을 재단하고 개조하기에 바쁜 것이다, 두 사람이 모두 이와 같이 하면-아주 흔히 있는 일이지만- 사랑의 관계는 상호 투사의 관계로 변한다.
-p136
두 사람이 서로 그들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귈 때, 그러므로 그들이 각기 자신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 비로소 사랑이 가능하다. 오직 이러한 ‘핵심적 경험’에서만 인간의 현실이 있고 오직 여기에서만 생기가 있고 오직 여기에서만 사랑의 기반이 있다.
-p139
이기주의를 사랑으로 오해해, 서로의 결점을 개조하려는 그 신경증적인 과정이 꽤 익숙해 보인다. 위 글을 읽으니 흔히들 말하는 결혼할 때가 됐다는 의미가 나이 듦이 아니라, 각자 실존의 핵심이 뭔지 경험하는 때가 아닐까. 그 과정을 거친 어른이야말로, 다른 어른과 어울리며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사랑을 성취하는 중요한 조건은 ‘자아도취’를 극복하는 것이다. - 자아도취의 반대 극은 객관성이다. 이것은 사람들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이고, 이러한 객관적 대상을 자신의 욕망과 공포에 의해 형성된 상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온갖 형태의 정신병은 객관적일 수 없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무능을 보여준다.
-p160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이성’이다. 이성의 배후에 있는 정서적 태도는 겸손한 태도이다. 객관적이라는 것, 곧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겸손한 태도를 갖게 되었을 때, 어린아이로서 꿈꾸고 있던 전지전능의 꿈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가능하다.
-p162
겸손과 이성의 관계를 생각해 본 없지만, 연관지어보니 비슷한 결 같기도 하다. 어린아이의 자아도취된 사랑의 꿈을 벗어나려면 겸손해져야 한다는 게 약간 머쓱하지만 말이다.
그는 일반적으로 모든 살아있는 것의 자체 역동성에 대해 탐구했고, 생명체에게는 생존 추구를 넘어서서 ‘통합하고 합일하려는 경향’이라는 특징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합일과 통합된 성장이란 모든 생명 과정의 특징이며, 세포뿐만 아니라 감정과 사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p203
이제 사랑은 자연적인 일이 아니라 기술적 문제가 된다. 사랑은 하느님이 준 능력이므로 우리가 느끼는 대로 행동하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안일한 대답을 하기에는 현대 사회와 인간은 너무나 복잡하고 너무나 교묘하다. 그러므로 이제 사랑을 회복하는 데는 절실하게 기술이 필요하게 되었다. 우리가 사랑하려고 애쓰면서도, 참으로 나를 주는 사랑을 하고 싶으면서도 이러한 사랑에 실패하는 원인은 기술의 미숙성에 있다.
-p211
사랑이야말로 완전히 감정과 합일되어야 행할 수 있는 줄 알았건만, 교모한 인간의 관념이었나. 회복하는데 필요한 기술이나 모든 생명이 원하는 통합된 성장은 역시 내면의 핵심을 가리킨다. 책의 메시지처럼 내면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말은 이젠 너무 흔하지만, 그게 사실인 점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그 인생의 작업을 파트너인 배우자와 함께 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복이라 할 수 있겠지.
사랑의 기술은 연애를 잘 하는 스킬을 명시한 책이 아니고, 사랑의 개념을 다시 재조명하고 객관적으로 보는 시선을 잡아주는 데 도움이 된다. '진정한 사랑' 혹은 '진실한 사랑'에 대한 각자만의 몽글한 상상과 기준이 자아도취는 아닌지 점검해 보기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