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23/(주)민음사
글-맛: 글이 가지는 독특한 운치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
제목만 봐도 울긋불긋한 석양이 눈앞에 서글서글했고, 이번 책도 작가 특유의 표현으로 감성을 파고들겠지 싶었다. 하지만 의외로 조금 익숙한 재난 영화 같은 스토리라 인물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페이지를 넘겼다는.
그런 게 지나의 희망인지도 모른다. 국경을 넘거나 벙커를 찾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희망. 과거를 떠올리며 불행해하는 대신, 좋아지길 기대하며 없는 희망을 억지로 만들어 내는 대신 지금을 잘 살아 보려는 마음가짐.
-p55
전염병으로 모든 국가는 멸망했다. 살아남았기에 살아가는 삶이 좋아지길 기대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희망 대신 지금을 잘 살아보려는 마음가짐조차 대단해 보인다. 이런 내용의 영화나 시리즈물을 많이 봤고 그때마다 생각했다. 나라면, 살려고 했을까 멈췄을까. 나라면, 살려고 저토록 애썼을까, 힘을 빼어버렸을까. 아직도 답을 모르겠다.
단의 퇴근시간이 부쩍 늦어지던 때가 있었다. 혜림이 막 학교에 들어갔을 때였다. 일주일에 두어 번씩 새벽 두세 시 넘어 들어왔다. 처음 몇 달간은 만취한 채였다. 이후 반년 정도는 술에 취하지 않고도 늦었다. 외박도 늘었다. 외도는 눈치챘지만 아는 척하지 않았다. 울고불고 따질 여력이 없었다. 내가 안다는 걸 그가 알게 되어 둘 사이에 생길 감정 소모도 피하고 싶었다. 잠시 이혼을 생각했지만 번거로웠다. 돌아올 사람이면 돌아오겠거니 생각했고, 그는 돌아왔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대했다. 고백도 용서도 없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기억을 지웠다. 이다음에 늙어서, 더는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을 때도 단의 외도가 기억난다면 그때 물어봐도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장 알게 되어 더 상처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언제부터 시작된 질문인지 모르겠다.
-p93
몇 년째 그렇게 살다 보니까 이게 정말 내가 원하던 삶이었나 싶어요. 아침에 회사 갈 때마다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하는데,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서는 이 정도로 될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고.
-P94
이혼만이 번거로울까. 관계의 모든 갈등이 번거롭다 못해 피곤해 지우개로 싹 지우고픈 마음도 들지 않나. 원하던 삶은 결코 아니었지만, 대단히 나쁜 삶도 아니라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 묻는다. 잘 살고 있는 것일까. 퇴근길 넘어가는 붉은 해가 젖어드는 하늘을 보면서 누가 하는지 모를 질문을 문득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다.
지킬 것을 지키고 경계할 것을 경계하고 함부로 사람을 믿지 않는 것.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게 되더라도 수치심만은 간직하는 것. 오늘 내가 살아 있음에 의문을 품는 것. 한국에서의 삶이 그랬다. 이곳의 삶이라고 다를 것 없다. 아니,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홀해지지 않을 수 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유심히 보고 듣고 아낄 수 있다. 한국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소중한 사람을 미뤘다. 내일이 있으니까. 다음에 하면 되니까. 기나긴 미래가 있다고 믿었으니까. 이젠 그럴 수 없다.
-P99
지켜야 한다. 사람이 무엇인지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집엔 언제 가느냐고 해민이 또 묻는다면 대답해야 한다. 최선을 다해 설명해야 한다. 미루는 삶은 끝났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
-P100
소중한 사람을 미룬다는 것. 문장으로 읽으니 그 행위가 명확해진다. 내일이 있다는 게 사람 마음을 간사하게 만든 걸까. 다음과 미래가 없는 상황에선 삶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수치심과 사람에 대해, 사랑에 역할을 다하는 것에 대해 간절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니까.
역시 벙커 같은 곳에는 가고 싶지 않다. 그런 곳에서 다시 사람들에 섞여 살아남고 싶지는 않다. 나는 아주 고요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죽는 날까지 좋은 것을 지킬 것이다. 좋은 것은 소중한 것. 내 중심에 있는 이것. 그렇게 마음먹었다.
-P131
바닷물로 얼굴을 씻고 해변을 바라봤다. 살면서 단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난 언제나 권지나. 지나에게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면 어떤 경우에도 힘이 났다. 내겐 꿈이 있고 그 꿈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물고기를 잡고 새콤달콤한 열매를 따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다.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다. 살아 있어라. 제발 살아만 있어라.
-P184
인간에 대한 사랑, 애정은 어느 상황이든 상관없이, 혹은 특수한 상황에서 더 강력하게 생겨버리는 감정인가 보다. 그 간절한 마음이 사치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스토리의 후반부는 이 세계의 멸망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변화만 관찰하고 서술할 뿐.
그저 글로도 이처럼 영화 같은 광대하고 황량한 장면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여느 소설과는 소재부터 다르고 각각의 인물 서사를 표현해서 그런지, 최진영 작가 특유의 집요한 감정 순환의 표현이 좀 덜해서 담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