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글ㅡ맛

글-맛: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정이현)

2018.09.25 / (주)현대문학

by grim jari
글-맛: 글이 가지는 독특한 운치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


가끔 그런 때가 있다. 계획 없던 빈손 외출(?), 카페보단 서점에서 책 한 권 읽기 좋은 시간이 생겨버린 날 말이다. 다행히 집 근처엔 커피를 사면 무한대의 책을 읽을 수 있는 카페 꼼마가 있다. 편한 복장에 슬리퍼를 끌고 가, 주문한 라떼가 나올 때까지 책을 두리번거리다 정이현 작가의 책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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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원 앞에 놓인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었다. 사실을 밝히거나, 그러지 않거나. 늦은 줄 알았을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은 옳았다. 바로잡으려면 그때 했어야 했다. 자신의 얼굴이 조금 붉어지기는 하였겠으나, 아무의 얼굴도 크게 붉어질 필요는 없이 오류는 수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원은 오해를 바로잡으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오해를 확고히 하는 시도를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실제로 만날 일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상황을 그냥 놔두었다. 시간이 그렇게 갔다.
-p95


무원은 한 온라인 카페에 가입하고 우연찮게 성별을 오해받지만, 그냥 놔둔다. 다른 경우지만, 나 역시 사사로운 오해들을 바로잡으려는 힘을 아낀 지 좀 된 것 같다. 귀찮고 어차피 상관없어서란 핑계로 놔뒀고, 수정한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어차피 오해한 그 사람조차 상관없었으니까. 지금 와서 보면 그것을 선택이라 말할 수 있을까. 사람과 삶에 회의적인 태도를 단념과 포기로 행동한 건 아니었는지.


누가 아프다고 하면 심장 안쪽에 손을 넣어 눈물을 닦아줄 필요까지는 없었다. 피부와 피부는 반드시 닿지 않아도 되었다. 닿지 않아서, 희미해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들이 있었다. 대바늘로 성기게 뜬 털 스웨터의 무늬들처럼 대수롭지 않은, 그 대수롭지 않음으로 구성된 작은 환대의 세계.
-p97


때론 전화나 만남보다 글로 타인을 대하는 게 수월하다. 주로 업무에 관련된 관계일 때 그렇다. 그럴 때 마음을 주고받는다고 하긴 그렇고, 작가의 글대로 작은 환대의 세계 정도면 딱 적당하다. 오히려 희미할수록 주고받을 것이 명확해지는 관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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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에 엉켜 있는 온갖 복잡한 아이러니들을 한 가닥씩 풀어나가다 보면, 독자는 마침내 이러한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당신은, 그리고 우리는 정말 안녕한가, 돌이킬 수 없는 큰 병을 앓고 있진 않은가, 진정 소중한 것을 상실하고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는 작가 자신을 태어나게 했고, 품어주었으며, 한때는 절망하게 했던 도시를 향해 바치는 애증의 서사다.
-p150


이 소설은 2,3시간이면 완독 할 만큼, 익숙한 현실과 근접한 이야기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 속 사람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기 때문일지도.

문제와 병을 갖고 살지만,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이 이 땅에 가득하다고 상상하면 커피의 뒷맛이 더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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