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17 / 비꽃
글-맛: 글이 가지는 독특한 운치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
첫 장 내용부터 마치 영화가 시작되는 느낌이 든다. 영상을 글로 보는 기분이라 몰입이 잘 됐다. 시험관 아기 수준을 훨씬 넘어서, 과학 기술로 사람을 만든다고 볼 수 있는 세계의 디테일한 설명이 매우 흥미로웠다.
그러다 보면 마침내 아이 마음은 암시한 내용대로 변하고, 암시 내용은 모여서 마음이 된다. 아이 마음만 그런 게 아니다. 어른 마음도 똑같다.. 평생에 걸쳐, 무얼 판단하고 갈망하고 결정하는 마음은 암시받은 내용이 모인 결과다. 우리는 모든 걸 암시한다! 국가가 모든 걸 암시한다!
-p33
그런 거 말고. 나는 가끔 묘한 느낌에 빠져들어, 내가 아주 중요한 말을 해야 하고 그럴 힘도 있다는 느낌.. 그런데 그게 뭔지 모르는 느낌, 그 힘을 조금도 사용할 수 없는 느낌. 글을 색다른 방향으로 써야 한다는 느낌.. 뭔가 색다른 내용을 떠올려야 한다는 느낌...
-p76
배아일 때부터 철저하게 계급이 나눠지고, 양육방식이 구분되어 각기 다른 암시를 듣게 된다. 아주 아주 아주 작고 약한 생명체일 때부터 듣는 암시는 죽을 때까지 존재를 조종한다. 본성과 특성, 고유한 성격들은 애초에 필요가 없는 세상이다.
정말 이런 세상이 온다면? 싶어 긴장한 채 읽었는데, 나중엔 '지금은 이런 세상이 아닌가?' 싶어졌다. 흙 수저, 금수저라는 단어도 떠올랐다. 과연 나는 어떤 암시에 걸려있을지.
우리는 신과 별개로 살 수 있는 거야. '종교적인 감성은 그동안 잃어버린 걸 모두 보상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보상받아야 할 만큼 잃어버리는 게 없어. 종교적인 감성 자체가 불필요한 거야. 젊길 바라는 욕망 자체를 못 채운 적이 없는데, 젊길 바라는 욕망을 대체할 대상을 찾아다닐 이유가 뭐지? 어리석은 놀이가 사방에 가득해서 끝까지 즐기는데, 잡념을 대체할 대상은 왜 찾아다녀야 하지? 다양한 활동을 통해 몸과 마음이 황홀한데 깊은 명상에 잠길 이유가 뭐지? 소마가 있는데 따로 위안받을 필요가 뭐지? 사회질서가 확고한데 다른 확고한 존재에 의존할 이유가 뭐지?
-p254
'소마'를 먹으면 두려움이 사라져 기분이 편안해지고 해방감을 느낀다. 멋진 신세계에도 먹는 행위가 주는 기쁨이 있나 보다. 늙지 않고 젊음의 아름다움을 죽을 때까지 누릴 수 있다. 어찌 보면 아쉬울 게 없는 동시에 인간의 간절함이나 신념은 의미 없는 세상이다. 그냥 태어난 대로 살다가 죽으면 된다.
늙어 내 모습이 변하는 게 불편하고, 감정을 스스로의 힘으로 다스리고, 미래의 안녕을 엿봐야 하는 지금의 내 세상이 더 옳고 좋다 말할 순 없지만- 분명한 건 지금이 더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순리대로'라는 것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올더스 헉슬리가 표현한 누군가가 순리를 정하고 통제하는 멋진 신세계가 기이하게 느껴지는 건, 그것이 뭔가와 다른 방향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겠지.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왜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재밌다고 하는지 알 것 같다. 한 편의 영화 같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