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01 / (주)자음과 모음
글-맛: 글이 가지는 독특한 운치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
내게 신앙심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하느님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다. 뭘 어떻게 해달라고 기도한 기억도 없다. 주말이면 셋이 함께 치르는 고요한 의식이 좋았을 뿐. 그 시간을 기다렸고 함께할 수 있어서 안심했지. 그런 마음과 신앙심이 많이 다를까? 도우, 민주와 나란히 서서 기도문을 외우고 성가를 부르고 영성체를 하려고 제단을 향해 쪼르르 걸어가는 과정 속에서, 언제부터인가, 나는 위안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다행이고 좋다는 느낌은 위안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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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와 애정, 지형은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부류였다. 나의 경우는 그런 단어를 글자로 쓸 수는 있으나 소리 내서 말하기는 어려워하는 부류. 내게는 그와 같은 단어들이 있다. 생각하거나 쓰는 것까지는 무리 없으나 소리 내어 말하는 순간 가짜가 되어버리는 단어들, 이를테면 사랑, 우정, 소망, 꿈, 희망, 희생, 추억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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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정말 다 가지려고 하는구나. 다르게 살고 싶다고? 그냥 1등을 바라면 안 돼? 그게 우리의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인정하면 안 돼? 너도 그렇게 말했잖아. 3학년 됐으니까 입시해야 한다고. 전공어 내팽개치고 국영수만 졸라 파고 있다고. 딱 거기까지만 하면 안 돼? 돈과 명예 말고, 우리가, 또 다른 가치를 가져야만 해? 사랑, 희생, 정의, 존엄 같은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해버리면 삶이 복잡하게 꼬일 것만 같았다. 그런 가치를 추구하느니 조롱하는 편이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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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가 떠나야만 했던 이유는, 내가 힘들다는 생각에 갇혀 있기 때문이었다. 인생에 찾아오는 잔잔한 진동에 크게 동요했던 거다. 그게 싫었다. 별일 없어도 계속 바닥에 가까운 기분으로 살아야 하는 게 싫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를 흔들기 위해서는 파도 정도는 필요했다. 파도 정도에 흔들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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