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02 / 복복 서가(주)
글-맛: 글이 가지는 독특한 운치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
정말 오랜만에 김영하 작가의 책을 읽었다.
9년 만의 신작 장편이라는 타이틀이 이목을 집중시켰고, 믿고 보는 작가이기도 해서 고민 없이 결정!
작별 인사라는 제목만 보고 내용을 멋대로 상상했던지라, 인공지능과 로봇이 나올지는 생각도 못 했다.
-난 내가 인간이 아닐 거라고는 한순간도 생각해 본 적 없어.
-자기가 누구인지 잘못 알고 있다가 그 착각이 깨지는 것, 그게 성장이라고 하던데?
-p83
다들 자신을 잘 알고, 그에 맞게 살고 있다 생각하지만, 말 그대로 '생각뿐'임을 살면서 언젠간 알게 된다.
그때부터 좋게 말하면 성장통, 즉- 혼란과 분리 속에서 갈등이 시작된다.
나는 누구고, 원하는 건 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말이다.
착각이 깨지지 않으면, 한 번도 생각해 볼리 없는 가장 중요한 것들.
소비자들은 한번 다른 집에 입양됐던 중고 휴머노이드 아이는 원하지 않거든. 성격이 이미 형성됐다고 생각하는 거야. 파양 된 걸 보면 성격에도 문제가 있을 거라 넘겨짚기도 하고.. 그들은 사용감이 없는 아이만 원해.
-p98
휴머노이드- 즉, 사람 형태를 한 로봇 아이가 인간(소비자)에게 입양되고 파양 되는 과정이 우리의 현실 속에 아이나 반려동물들이 겪는 지금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사용감이 없다는 것은 뭘 의미하는 걸까.
걱정하지 마. 누나가 고쳐줄 거야. 넌 내가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인간보다도 훌륭하고, 그 어떤 인간보다도 온전해. 우리는 의식을 가진 존재로 태어났어. 민이 네가 인간이든 기계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수억 년간 잠들어 있던 우주의 먼지가 어쩌다 잠시 특별한 방식으로 결합해 의식을 얻게 되었고, 이 우주와 자신의 기원을 의식하게 된 거야.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잠깐을 이렇게 허투루 보낼 수는 없어. 민아. 너는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다 보고 느끼게 될 거야. 걱정하지 마.
-p99
하지만 선이의 세계관에서도 생에 대한 집착은 당연했다. 지금의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개별적인 의식을 갖고 있지만 죽음 이후에는 우주정신으로 다시 통합된다. 개별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나와 너의 경계 자체도 무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이에게도 이 생의 의미는 각별했다. 개별적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 있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니 너무나 짧은 이 찰나의 생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분투하고, 우주의 원리를 더 깊이 깨우치려 애써야 한다는 것이다. 선이에게는 그래서 모든 생명이 소중했다. 누구도 허망하게 죽어서는 안 되며, 동시에 자신의 목숨도 헛되이 스러지지 않도록 지켜내야 했다.
-p108
'작별 인사'에서 유일하게 인간다운 인간 선이는 마치 김영하 작가가 책을 통해 뭘 말하려는가를 대신 전달하는 인물 같다.
가끔 나오는 우주의 원리라는 단어가 다소 모호하게 들리지만 그에 관련된 책을 자주 접한 이라면 전혀 이질감이 없을 것이다.
생의 의미는 우리는 개별적으로 살아 있고 이 순간에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건 무엇인가를 짚어 보는 것이며, 그렇기에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는 문장은- 묵직하고 뜻뜻한 기분이 든다.
아이를 낳을 때 인간의 부모도 모두 이기적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으면 나중에 내가 늙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아이가 외동이면 외로우니까 하나를 더 낳아주자. 그런 생각들을 자연스럽게 하죠. 심지어 아이를 낳으면 국가가 보조금이나 집을 주니까 낳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 것도 다 이기심이죠. 생각해 보세요. 이타심으로 아이를 낳는다는 게 가능할까요? 실은 다들 이미 존재하는 누군가를 위해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p186
아이를 낳는 것과 이기심의 관계를 생각해 본 적 없지만- 그것만으로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감당하는 건 아니라고 빠득빠득 반박할 거리도 없는 걸 보면, 나도 이미 느끼고 있었는지 모른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나와 남편의 평범한 결혼생활을 위해, 손주를 보고 행복하실 부모님을 위해, 혹여나 고독해질 수 있는 말년을 위해- 작은 비율의 이유들이 모여 임신을 결정했다고 아니 말할 수 없다. 이기심이 맞다.
'작별 인사'는 SF 소설은 아닌 게 그렇다기엔 내면을 건드리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마지막 장을 덮고서야 왜 제목이 작별 인사인지 알겠더라. 책 표지 그림의 의미도 제대로 다가온다.
재밌게 빨리 읽었고, 로봇과 우주의 소재로 약간 호불호는 있을 듯싶지만 나는 꼭 추천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