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7.15/(주) 한겨레엔
글-맛: 글이 가지는 독특한 운치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
간만에 책을 한 권 사볼까- 싶어 교보문고 앱을 구경하다 어김없이 검색창에 '최진영'을 적었다.
아껴두고 안 읽은 책이 몇 권 보였는데, 유독 눈에 띄는 제목이 있었다. 거 참, 요즘 소녀라는 단어가 눈에 자주 보이네.
나는 칼을 꼭 쥐고 또박또박 말했다. 백곰의 눈엔 내가 열 살도 안 된 어린애로 보이겠지만, 나는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보고 듣고 짐작하는 천년의 세월을 살았다. 태어나서는 그보다 훨씬 지독한 세월을 단숨에 견뎌냈다. 맞고 때리고 지르고 울고, 부수고 찌르고 할퀴고 물고, 박살 내고 집어던지고 다치고 도망가고, 닦고 짓이기고 삼키고 내 혀부터 씹어대는 그런 것들.
-p55
책에 나오는 소녀는.. 이름 없는 이 소녀는, 기억에 남는 주인공 정도를 넘어 날카로운 손톱으로 가슴을 후벼파는 인물 같다. 글자로만 존재하던 소녀가 없앨 수 없는 입체적인 흔적을 남긴듯한 느낌이랄까.
부조리한 사회와 환경이 소녀의 세월을 천년으로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조차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세상에 진짜란 게 하나도 없다면, 그러니까 온통 가짜뿐이라면 어쩌지? 그럼 세상에 진짜는 오직 나뿐인가? 정말 그럴 수도 있을까? 나는 진짜가 맞나? 내가 진짜임은 누가 확인해 주지? 내가 진짜를 찾아 헤매듯, 세상의 어떤 진짜는 나를 찾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꼭 진짜를 찾아야 한다. 내가 진짜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p118
존재의 의미가 위태로워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고, 결국엔 내가 진짜이길 바라는 그 마음 하나. 그것이 소녀를 살게 하는 힘.
그렇게 울고 웃는 사이 불행은 평범해졌다. 평범해진 불행엔 힘이 없다. 그냥 그까짓 것이 된다.
하지만.
나는 불행하다.
아무리 그까짓 것이라고 생각해도.
-p244
최진영 작가는 불행이 평범해진 경험을 했던 걸까.
이런 문장은 경험 없이 나올 수가 없는데.
날마다 새로운 날이 아니라, 날마다 같은 날. 아주 사소한 것들만 변할 뿐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틀과 원리는 어디든 비슷해서, 맞는 사람은 늘 맞고 으스대는 사람은 늘 으스대며 때리는 자는 늘 때리는 자다. 그것을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지 알 순 없었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그것을, 그런 이치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은 그들의 뜻대로 굴러간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반쯤 헐린 나의 공간에서 지켜보았다.
-p286
매일이 새로운 오늘이긴 한데, 진짜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는 따로 있다고 짐작할 순 있지.
그걸 이치라고 받아들인 사람 중 하나가 나일지도.
마지막 장을 덮고도 잦은 생각은 마무리 짓지 못했다.
아마도 이름 없는 그 소녀는 언젠가 내 옆을 스쳐갔으려나.
흔히 지나쳐버리는 사람 중 하나인 그녀의 인생에 준비 없이 뛰어든 기분이다.
다음 생애엔 이쁜 이름 하나 갖고 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