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6. 매홍손, 팡마파, 빠이
Day 6.
이른 아침부터 세바스티앙이 침대 커튼 너머로 나를 깨운다. 반쯤 찌푸려진 얼굴로 커튼을 걷고 보니, 녀석이 큼지막한 손을 내밀며 바이크를 잠시 빌리자고 한다. 그도 오늘은 이 곳 매홍손을 떠나기 위해 버스를 예약하려고 한단다.
"나 그거 흠집 나면 안 돼."
"알아, 알아. 걱정 말라고."
깔끔한 외관과는 다르게 5도 정도 바이크가 기울어 있다는 사실을 거듭 알려주었으나 세바스티앙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미소를 한번 익살스럽게 짓고서는 헬멧도 쓰지 않고 바이크를 몰고 금세 사라졌다. 덕분에 나도 의도치 않게 잠에서 깨어 며칠간 밀렸던 요가(Yoga)를 하고 여느 때처럼 요거트와 바나나를 하나 챙겨 먹었다. 다행히 아침운동과 식사를 끝내고 나니 세바스티앙이 스무스한 주행으로 무탈하게 숙소에 돌아왔다. 그가 씨익- 하는 웃음과 함께 다시 키를 건네준다. 나 어릴 적 쿨(Cool) 병도 아마 이런 모습이었을까? 그래도 미운 구석과 느낌이 하나 없는 그였다. 짜식-
새롭게 만난 친구들 몇은 먼저 떠나가고, 또 새롭게 만난 몇 친구들은 오전 일찍부터 그들만의 여행을 떠났다. 그런 그들을 보고서 손을 흔들면서 나도 인사를 남긴다.
"나도 오늘 떠나. 길에서 또 만나자."
"그래? 좋아. 길에서 다시 만나."
"See you on the road."
주인장과도 그간 친분이 꽤 생겼지만 마지막 마무리까지 깔끔한 인상으로 남고 싶어 지체 없이 짐을 쌌다.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샤워를 하고, 짐을 싸고, 준비를 다 마쳤다. 떠나기 전에 식사를 하고 갈 요량으로 별관에 가서 점심식사를 주문하고는 정이 든 숙소를 다시 한 바퀴 돌았다. 사람들에게도 너무 추천하고 싶은 곳이면서, 왠지 다른 이들이 너무 많이 찾지는 않았으면 하는 욕심이 생기는 딱 그런 곳이었다. 본관의 건물을 잠시 바라보며 또 오자- 하는 마음을 가졌다.
매홍손에서 많은 것을 하고, 보고, 또 다녔지만 동시에 좋은 충전이 되었다.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의 인연과 합이 좋았고 그 자체로 힐링이 된 것 같다. 길을 떠나는 마음이 사뭇 가벼웠다. 오히려 다시 처음 출발과 같은 기대감으로 재무장이 되었다. 앞으로의 일정과 여행도 이렇게 즐거운 인연들이 가득하기를.
주인장 가족들이 문 앞까지 나와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들에게 '끝장나는' 리뷰를 약속하고, 나도 길을 떠났다. 로시도 오랜만의 장거리 주행에 신이 났는지 부드러우면서도 좋은 엔진음을 들려주었다. 오늘 목표는 빠이(Pai)다. 한 때 장기 여행자들의 성지이자, 히피들의 천국이었던 태국 북부의 작은 마을 빠이. 여느 여행지와 같이 그 명성과 유명세가 점점 커지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되었고 과거의 한적하고 평화로운 모습은 많이 잃었다는 평이 많지만 그래도 어찌 이 작은 세상에서 꼭 누군가의 마음에만 드는 곳으로 남을 수 있을까. 오랫동안 여행에 몸 담으면서 나 역시도 '아 거기', '나 때는', '지금은' 등의 사족을 많이 붙이고는 했지만 돌아보면 가장 크게 변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아닐지. 도시나 마을이 변하는 것이 싫다면 그저 나부터도 내버려두면 될 일이지만- 사람 마음(욕심)이 어디 그게 쉬운가. 나도 그렇게 거의 5년 간의 공백을 두던 마을을 이런저런 생각과 마음으로 다시 찾게 되었다. 사실 이 곳에서 바이크를 타고 진행할 수 있는 길의 옵션이 그리 많지 않기도 하고.
30-40분 가량을 지도를 따라 달리고 보니 1,864라는 표시석이 눈 앞으로 다가왔다. 매홍손-빠이-치앙마이 구간의 악명 높은 커브 숫자다. 총 일천팔백육십사 개의 커브를 돌고 돌아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는 구간. 보통 치앙마이에서 빠이를 거쳐 매홍손으로 오는 루트가 좀 더 일반적인데, 이번에 이 역방향의 루트를 택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이 커브 때문이다. 커브의 난이도가 치앙마이에서 빠이로 오는 구간이 좀 더 고되다. 그래서 총 여행의 진행 방향으로 보나 바이크 주행의 적응 순서로 보나 매홍손에 먼저 이르고 빠이로 이동하는 것이 좀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애초의 계획(기획)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그 편이 나에게는 확실히 옳았다. 단기 일정으로 이 곳을 찾는다면 이런 도로의 사정이 여행자에게 큰 불편을 줄 수 있지만, 지금 나는 다행히도 특별히 쫓을 일정이 없었으므로 간략하게 절반의 구간인 빠이까지를 목표로 하고 출발한다. 그래도 괜스레 미리 뿌듯함을 느끼며 바이크를 멈추고 사진을 한 장 남겼다.
기운찬 출발도 잠시 비가 세차게 내렸다. 지난 며칠 동안 몸만 가볍게 바이크를 탔더니 이 고개와 커브를 넘고 지날 때마다 변화하는 날씨를 그새 까먹었나 보다. 아, 맞다. 이거 엄청 귀찮은 문제였지. 여행 출발 전에 일부러 우의를 샀다. 그것도 우의 전문점에서 나름 고르고 고른 것. 그래서 방수와 방풍이 아주 좋은 모델이었지만 그만큼 두께감이 있어 이게 주행에는 여간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입으면 덥고 벗으면 비가 와서, 나를 못되게 괴롭혔다. 그래서 웬만하면 입지 않으려고 비를 피할 곳이 있으면 그곳에 잠시 바이크를 세우고 기다렸다. 운이 좋으면 같은 처지의 낯선 이를 만나기도 하고. 그도 나름대로 소소한 여행의 재미 중 하나였다. 비가 그치면 서로 눈인사를 나누고 금방 날이 갠 각자의 도로로 사라진다.
커브길은 즐거웠다. 무난했기 때문에. 그리고 한 차례 비가 크게 다녀간 후로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쨍쨍하고 맑은 날씨가 계속되었다. 아웃 인 아웃(Out In Out: 코너링의 한 기법)의 잔기술을 부리며, 휘파람도 불고 콧노래도 흥얼거리며, 따뜻하고 선선한 산길을 기분 좋게 달려 나갔다.
태국의 행정구역은 주(매홍손 주, 치앙마이 주, etc.) 아래 여러 암퍼(Amphoe)로 구분되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도(道) 아래 군(郡)과 같은 개념이다. 매홍손에서 치앙마이로 향하는 길에는 두 곳의 암퍼가 있다고 하고 하나가 바로 빠이(Pai)이고, 다른 하나는 매홍손에서 빠이 사이에 있는 팡마파(Pang Mapha)이다. 고산족인 리수족과 라후족의 터전이 있다고 하는 지역인데, 매홍손에서의 기억(레드 카렌족의 마을)이 아직 다 아물지 않아 호기심을 거두고 길을 따라 달리는 데에 집중하였다. 그래도 이 근방에는 적당히 지칠 즈음한 구간마다 뷰(View) 포인트가 있었으므로 자연의 풍광과 산세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산 정상 부근에는 인근 부족 사람들이 기념품이나 휘발유, 간단한 간식을 팔면서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그들 몇몇의 복장(Coustume)을 단서 삼아서 각 부족의 정체성을 짐작해보았다. 한 사람은 다나카(Tanaka: 미얀마 여인들이 얼굴에 바르는 것)를 바르고 있어 괜한 아는 척으로 물어보니, 그냥 피부에 좋아서 발랐다고 해서 조금 무안하기도 했다. 아는 것과 추측하는 것은 분명 다른 일이다. 여행자의 얕은 지식과 정보로 그들에 누구에 대해서도 속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자색 군고구마는 너무 맛있었다.
몇 시간을 달렸지만 커브는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연료 게이지가 마지막 한 칸이 남았을 때 즈음, 마지막 고지에 도착했다. 일전에 빠이에서부터 와 본 적이 있는 뷰 포인트였다. 이다음 내리막을 계속 달리면 곧 빠이에 도착한다는 말. 정상에서는 역시나 휘발유를 판매하고 있었는데, 이런 간이 판매소에서는 기름에 다른 첨가물을 섞어서 판매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잠시 생각해보다가 더 이상의 오르막이 없을 것으로 판단했으므로 유사시에는 내리막을 이용해서 달리면 될 것 같아서 따로 주유를 하지 않고 빠이로 곧장 향하기로 했다.
정상에서 한국인을 한 명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아는 길을 재차 물어 확인하고는 그가 사라진 방향을 따라서 나도 로시를 몰았다. 오래 전의 기억이지만 길에 대한 감각과 기억력이 아버지를 닮아 매우 좋은 편이라 초행길 같지 않은 기분으로 매끄럽게 마지막 커브들을 지나서 평탄한 마을 지역으로 내려왔다.
마을 초입에서부터 확실히 변모된 마을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우선 마을 자체의 경계선이 더욱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태국의 대표 편의점인 세븐(일레븐)이 이제 마을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당연히 수요에 따른 공급과 변화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을 중심부에 이르기도 전에도 이미 많은 것들이 예상되었고, 숙소에 다다르고 보니 역시 예상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참 빠르구나- 하긴 좋은 것이 비단 나한테만 좋은 것이었을 리가.
하긴 이런 변화 덕분에, 과거엔 자발적으로 모기들의 밥(?)이 되면서도 그 분위기와 로망에 한껏 취했던 방갈로(Bungalow)를 피해 세련되고 신식의 숙소에서 머물 수 있게 되었으니 그 또한 불가피한 소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숙소에 무려 에어컨이 있다! (빠이는 대체로 선선하거나 싸늘한 저녁 날씨 덕분에 에어컨이 크게 필요 없는 곳이다)
애초 이번에도 방갈로를 택해 빠이 특유의 감성과 분위기를 즐겨보고자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든다, 라는 표현조차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시기에 현실 인식이 그리 부족한 타입의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의 겸허한 자세로 숙소를 정했다. 아고다를 통해 저가 정렬을 했음에도 무려 에어컨이 있다.
마침내 다시 빠이(Pai)로 돌아왔다는 마음의 여유가 짐을 풀자마자 순식간에 차올랐다. 이 곳에서도 2-3일 정도를 쫓기지 않고 쉴 생각으로 배낭 꽤나 안쪽의 짐들까지 침대맡에 꺼내 두었다. 주인장은 나를 배려해 한국인이 있는 도미토리로 주느냐고 물었으나, 잠시 생각하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4인실 숙소, 빠이에서의 첫 룸메이트는 그렇게 영어를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중국인 친구로 배정이 되었다. 진짜 단 한마디를 못해서 너무 신기했다.
"여어, 안녕. 나는 한국에서 왔어. 너는?"
"Me no speak English. Sorry."
"오오, 그렇구나. 아니야. 미안할 필요 없지. 천천히 조금씩 하자."
"No English. Sorry."
괜히 새 친구의 신경이 쓰이도록 괴롭히나 해서 금방 대화를 멈추고 웃음으로 대신 인사를 이어갔다. 그제야 그도 곤란한 표정을 풀더니 나와 꼭 같은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숙소 구경에 샤워를 추가하며 늦장을 부렸더니 어느덧 해가 기울었다. 저녁식사도 할 겸, 빠이의 중심부인 메인 거리(Pai Walking Street)로 나갔다.
비수기의 초저녁임에도 사람들이 꽤 많았다. 거리는 좌우로 빼곡하게 관광객들을 위한 가게와 식당, 여행사와 스쿠터 대여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과거 마을의 몇 안 되는 여행사 중 하나였던 아야 서비스는 이제 가게 앞으로 늘어선 그 스쿠터 수를 쉽게 셀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기억나던 모든 소소한 가게들은 상호나 업종이 바뀌거나, 건물 자체의 모양이 변한 곳도 있었다. 빠이의 여행자들, 히피들과 함께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이던 그 유명한 지코(Jikko: Jikko's Bar의 사장이었다)는 이제 아예 그 자리에 없었다. 대신 마을 구석구석 그의 이름이 붙은 가게와 그 자신은 역시 그의 이름으로 오픈한 호텔에서 주로 지낸다고 한다.
그는 사실 이 곳 빠이로 돌아오기 전부터 가장 보고 싶었던 인물이었지만 왠지 이제는 나와 같은 평범한 여행자와는 사이가 조금 멀어진 것일까- 하는 생각에 굳이 호텔을 찾아가 보지는 않았다. 수천, 아니 수만 명의 여행자와 보낸 시간 속에서 내가 선명히 그의 기억에 남아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뭔가 약간은 아쉬운 기분이면서도 그런 그의 성공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처음부터 원체 사업수완이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씁쓸한 기분은 1도 없었다. 오히려 계속 여행자- 라는 같은 자리를 맴도는 나 스스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첫날 저녁은 크게 변한 마을에서 홀로 갈 길을 잃은 아이 마냥 갈피를 좀처럼 잡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워킹 스트리트의 거의 끝자락 즈음에서 보통보다는 20밧이 비싼 팟타이와 10밧이 더 비싼 꼬치구이를 하나씩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맥주 한 잔으로 아쉬움을 흘려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를 정했다.
바(Bar)에서는 재즈라고 하기에는 조금 기초가 부족한 대신 흥과 필(Feel)만큼은 충만한 연주자가 열심히 그의 색소폰을 불었다. 곡이 매 번 중반부를 향할 때마다 어디선가 풀냄새가 짙게 풍겨왔다. 완벽함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하는 분위기랄까, 혼자만 꼰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순간에 존재하고 있나 싶기도 했다. 애꿎게 차가운 맥주병을 빙글빙글 돌리며 나 역시도 모두와 공간에 녹아들고자 했지만, 결국 자리에서 일어서 집으로 걸음 할 때까지 끝끝내 마음의 모든 아쉬움은 흘려보내지 못한 듯하다.
총 주행거리: 121.1KM
숙소 정보: Baan Kon Pai (아고다)
+) 매홍손-빠이 구간의 곡선 도로와 풍광이 주는 즐거움. 빠이에 무사 도착.
-) 주유(바이크)를 미리 해두고 출발했으면 더 좋았을 것. 산 정상에서 석양을 보지 못(안) 한 것.
=)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 오늘의 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