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 매홍손
Day 5.
건강한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할 것 같은 세바스티앙은 의외로 9시가 넘어서야 일어났고, 내가 8시 즈음 일어났으니 졸리는 분명 그보다 더 먼저 일어난 것 같다. 하루 만에 부쩍 가까워진 여행자들은 아침이 되자마자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세 사람 모두가 여유롭고 상쾌한 표정이었다.
격투기를 수련했다는 세바스타앙은 아침부터 이어폰을 꼽고서는 꽤나 격렬하게 푸시업을 했다. 그걸 지켜보던 졸리는 대수로운 일은 아니라는 듯이 옆에서 다리를 찢었다. (180도) 나도 돌돌 말아두었던 요가 매트를 잠시 꺼내어 스트레칭을 하고 주섬주섬 어제 귀갓길에 편의점에서 챙겨 온 코코넛 맛 요거트와 바나나 하나를 아침으로 먹었다. 나른함이 가시진 자리에는 이내 평화로운 게스트하우스에서의 여유로움이 찾아왔다.
우리 방 도미토리의 마지막 한 자리에도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오전이 거의 다 지나갈 즈음이 되니 다리 길이가 거의 내 명치까지는 오는 듯 한 금발의 여행자가 유유자적한 걸음걸이로 나타났다. 스위스에서 온 티나(Christina)라고 했다.
"안녕. 너 키가 어엄청 크구나."
"네가 좀 작은 것 같은데?"
졸리가 옆에 있다가 웃었다. 세바스티앙도 그런 그녀를 보며 엄지를 척- 하고 치켜들었다. 내가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티나보다 작은 거라고 볼멘소리를 하니 나를 지나던 티나가 내 어깨를 쓰담쓰담한다. 이거 괜히 아이가 된 기분인 걸-
쿨한 성격의 여행자를 마지막으로 우리 방의 크루(Crew)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졸리는 오늘 다시 길을 떠난다고 한다. 베트남인인 그녀는 태국의 오지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가 주말을 활용하여 짧게 인근을 여행하고 또 자리로 돌아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녀도 이 무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오전에만 가기 싫다는 말을 두 번이나 했다.
세바스티앙은 어느새 티나 옆을 차고앉아서 즐거운 얼굴로 한참을 이야기하고 있다가 함께 인근을 여행하기로 한다. 졸리의 버스시간을 물어보니 함께 어딘가 다녀오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었으므로 대신 내가 남아 마을 주변부를 함께 돌아주기로 했다. 티나는 씻을 시간도 필요 없다는 듯이 바로 방에 들어가더니 얇은 티셔츠만 하나 걸치고 다시 나왔다. 쿨하다, 쿨해.
며칠 간의 주행으로 잔뜩 흙먼지가 묻은 로시(난테)를 보며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지만 오늘도 네가 고생을 좀 해야 할 것 같다- 하며 언젠가는 꼭 하루 정도를 통째로 쉬게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졸리와 함께 마을 옆에 바로 붙어 있는 공원에 갔다. 특별함은 없어도 트레킹을 하기가 좋다는 주인장의 조언을 그대로 따른 결과였다. 날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었다. 청명한 하늘에, 볕이 분명하면서도 뜨겁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볼과 귀를 스치는 미풍은 잡생각 따위를 함께 가지고 빠르게 지나갔고 우리는 어렵지 않게 마을을 외곽에서 공원을 찾았다.
태국 최고의 높이에 폭포를 보유하고 있다는 매수린(Mae Surin) 국립공원은 빠이(Pai) 강을 끼고서 잘 정돈된 숲길과 작은 호수들, 쉼터들이 어우러져 마을을 떠나는 여행자에게 마지막으로 잔잔한 추억을 선물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나도 그녀 덕분에 무더위가 시작될 즈음의 시간을 피해 대신에 산새가 지저귀는 평화로운 공원에서의 힐링을 찾을 수 있었다. 둘은 사사로운 대화와 주제들도 서로를 좀 더 알아가기도 하고, 떨어져 각자의 템포로 숲을 탐험하기도 하며 휴식을 즐겼다. 졸리가 자꾸 궁금한 것이 있으면 나에게 물어보곤 했는데 하나 둘 대답하다 보니 어느새 나 스스로도 그녀의 질문에 같은 물음과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대화의 힘은 종종 타인을 통해서 나를 들여다보는 것에 있기도 하다.
가기 싫다는 말을 다시 꼭 두 번 더한 그녀를 다독여 숙소로 돌아왔다. 처음 봤을 때는 세계여행자인 줄 알았던 그녀의 배낭을 다시 보니 저 작은 체구로 매고 다니는 게 가능한지, 또 도대체 2박 3일의 여행에 무슨 내용물이 그렇게 많은지가 궁금했다. 살짝 물어보니 여자는 남자보다 훨씬 훨씬 필요한 게 많다- 라는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와서 더 캐묻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니 그녀가 한 번도 같은 옷을 입은 것을 보지는 못했던 것 같기도 하고.
짧게 만났지만 귀여운 동생 같기도 하고, 가끔 그녀가 묻는 질문들이 너무 날카로워서 대답을 해주기 전에 한번씩 깊은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하는 행동도 본인이 모르는 애교가 많아 세바스티앙과 나를 포함해 주인장에게까지 금세 사랑을 받은 그녀였다. 아시안(Asian)으로서의 자의식 또한 매우 강한 타입이라 나와 동질감을 느끼는 부분도 많았고 사람을 대하는 데에 예(Manners)가 있어 살가운 마음이 들었다. 아쉽기는 서로 매 한 가지이지만 또 길을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남는 것이, 길 위의 이치이므로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서로의 여행을 응원했다.
마을을 떠나기 전 바이크를 반납했기 때문에 이동수단이 없어진 그녀를 로시의 뒤에 태우고 매홍손 버스터미널로 갔다. 버스터미널에는 출발 10분 전에 도착을 했으므로 시간에 에누리랄 것도 없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바이크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올 이유가 없는 곳이 터미널이었지만, 온 김에 이전까지의 태국여행에서 익숙했던 풍경의 버스와 롯뚜(미니밴)를 보니 괜히 반갑기도 했다.
헤어지는 일은 몇 번을 반복해도 어색하다. 그저, '또 만나자' 혹은 '잘 지내라'라는 인사를 내뱉고 아쉬움을 삼킬 뿐이다. 여행자로서 지키지(지켜지지) 못할 약속은 거의 하지 않는 편이므로, 여느 때처럼 쿨한 척으로 잔뜩 무장한 채 졸리를 배웅하고 서둘러 터미널을 빠져나왔다. 잘 지내라-
숙소로 돌아오니 텅 빈 게스트하우스지만 낯설거나 외롭지는 않았다. 사실 이런 자유와 혼자만의 평온을 찾아 떠난 여행이기도 했기 때문에 본래의 방향으로 다시 선회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그런대로 편했다. 아무도 없는 도미토리 안에서 크게 음악을 틀어보기도 하고, 웃옷을 벗은 채로 허공에 원투 펀치를 날리며 땀을 흘려보기도 한다. 생각보다 해가 더디게 떨어졌으므로 다시 샤워를 하고 개운한 몸과 마음으로 매홍손이라는 마을을 둘러보기로 한다. 이 곳에 온 지 3일째인 오늘, 처음으로 마을을 본격적으로 탐방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람들과 같이 다니면 불편한 것 중 하나가 음식이나 먹는 것인데, 아무래도 상대방의 예산이나 취향을 신경 쓰다 보니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오래간만에 혼자가 되니 가벼운 마음으로 이것저것 위장에 쏟아 넣었다. 한 시간만에 꽤나 다양한 먹부림을 부리며 몸무게를 늘렸지만 또 가만히 로시 위에 앉아서 엑셀을 당기면 나를 원하는 곳에 데려다주므로, 참 이게 천국이 따로 없구나- 싶은 마음이 되었다. 아마 여행이 끝날 즈음엔 허리둘레가 1-2인치 정도는 가볍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이 된다.
매홍손의 중심부인 호수 바로 옆에는 왓 총캄(Wat Chong Kam)이라는 사찰이 있다. 규모와 역사(1827년~)가 있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향하게 되었다. 건축 양식이라던지 이런 것을 좀 더 잘 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래도 나름 차이점을 찾아가며 구석구석을 살펴본다. 독특한 소재와 질감의 불상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사찰을 나와 호숫가 주변을 거닐며 매홍손을 알아간다. 동행도 없고 굳이 서두를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온전히 나만의 템포로 마음이 이끄는 곳을 거닐며 손이 가는 대로 사진도 찍어본다.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모든 것이 좋았다.
먹부림은 사실 하루 종일 계속되었는데 로컬 시장에서 파는 꼬치나 길 가에서 파는 음료나 과자 등이라 지출금액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 포만감이 줄어들만하면 자꾸 채워 넣는 나의 식탐을 보며 스스로 살짝 감탄하기도 했다. 여행자들끼리 자연스럽고 익숙한 외국어(영어)로 대화하다가 현지인들과 서투른 태국어로 소통하려고 하니, 사실은 상인들을 만나는 그 서투른 재미 때문에 자꾸만 말을 걸고 뭘 사 먹은 것 같기도 하고-
조금 비싼 저녁을 (혼자) 먹고 어두워진 마을은 또 뭐가 다른가를 한참이나 배회하다가 점차 쌀쌀해지는 기온에 숙소로 돌아가기로 한다. 반팔만 입고 편하게 돌아다닌 건 또 오늘이 처음인 것 같아. 장거리 주행을 전혀 하지 않았으므로 숙소에 돌아와서도 특별히 피로도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른 밤과는 다르게 늦은 시각에도 별관이 시끌하다. 마을 근교를 탐험하고 돌아온 세바스티앙과 티나, 그리고 또 새로운 친구가 한 명 늘은 것 같다. 이 저렴하지만 매력적인 게스트하우스에는 여행자가 끊이질 않는다. 호스트(주인) 가족의 성실함과 따스함을 생각하면 마땅히 그래야 할 법한 일이기도 하고. 하루 종일 돌아다닌 탓에 친구들보다도 먼저 모기들이 극성으로 나를 반겨주었으므로, 별관의 실루엣에 가벼이 손인사만 하고 방으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다시 나왔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따라잡는 데는 약간 시간이 걸렸다. 서양 친구들만 있으니 영어가 조금 빠르다.
칠레 출신의 세바스티앙은 아웃도어(Outdoor) 브랜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자신만의 사업체를 만들 꿈을 가지고 있는 청년이었는데 새로 만나는 사람마다 본인의 꿈과 비전을 설명했다. 신기하게 몇 일만에도 그의 설명과 사업계획은 좀 더 구체적으로 변해있었다. 마침 파타고니아(Patagonia) 셔츠를 입고 나타난 내가 그의 매홍손 발표회의 조수가 되었다. 멀뚱한 표정으로 그냥 그가 하는 말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청춘의 열정이란-
티나는 그런 그에게 현실적이고 매우 대조적인 입장의 조언을 해준다. 브랜딩이라는 것이 해당 기업의 존속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구매를 향해야 할 텐데, 불타는 열정의 세바스티앙도 완전 초(Super) 히피인 티나의 미니멀(Minimal) 라이프 스타일을 설득하기에는 매우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세바스티앙도 이에 굴하지 않고 굳건한 믿음으로 자신의 꿈을 설명해나갔다. 사뭇 발전적이었던 대화는 대화의 핀이 아주 살짝 어긋남으로 마음이 상한 티나가 주제를 바꿨고 세바스티앙도 더 이상의 사족을 붙이지 않았다. 성숙한 마음의 둘은 물론 이내 다른 대화로 공감대를 형성했다.
숙소의 2층 다른 방에서 온 독일인 친구는 속기사처럼 우리의 대화인지, 그녀의 일기인지를 열심히 기록해 나갔다. 계속되는 모기떼의 공격에 우리는 결국 항복하여 밤을 마무리하기로 했고, 마지막으로 좀 더 대화를 나누며 크리스티앙에게 조언을 건넨 나는 그의 브랜드(Punta Arenas?)의 한국 사업권을 선물로 받았다.
사람들이 오고 사람들이 떠난다. 빈자리는 또 금세 채워지기도 하고 비워진 채로 한참을 남아있기도 하다. 여행자의 숙소는 다만 그녀(그)의 목적이 남아있는 한, 여행자들을 품고 또 따스한 마음으로 떠나보낸다. 이 곳에서의 하루하루가 마음에 들었다. 조금 더 머물까 싶다가도 그럼 지금의 이 기분이 퇴색될 것 같아 오늘을 마지막으로 내일은 길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친구들은 본관에 돌아와서 다시 멈춰진 수다를 이어간다. 그런 그들에게 밤인사를 먼저 고하고 홀로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뉘었다. 방 안의 불은 아직 켜둔 채로, 오늘도 가만히 돌아가는 선풍기를 한참 쳐다보고 잠이 든다.
총 주행거리: 78.8KM
숙소 정보: Crossroads House (아고다)
+) 매홍손 단독 먹방. 혼자만의 자유.
-) 아쉬움은 언제나 쿨한 척으로도 메꿀 수 없는 것. 오늘은 근데 뭘 이렇게 돌아다녔나? (78.8KM??)
=) 나중에 칠레 등산복 회사의 (한국) 대표이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림.
&) 오늘의 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