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7. 빠이
Day 7.
숙소에는 아주 자그마한 책 선반이 있다. 아마도 숙소 주인의 책이라기보다는, 대부분 여행자들이 두고 가는 도서들로 채워진 것 같은데 한국어 책도 있다. 다양한 종의 서적들이 나란히 있는데 한글 도서는 대부분이 가이드북인 사실이 괜히 눈길이 갔다. 쉼과 휴식에도 가이드가 필요한 것일까, 괜히 아침부터 여행부심을 부려본다.
숙소는 마을 중심의 도로를 조금 빗겨 난 골목에 자리하고 있다. 그 편이 오히려 좋았다. 특별히 분위기가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번잡스럽지 않았다. 숙소 바로 맞은편에 바이크 렌탈샵이 하나 있었는데 위치상 바이크를 타보지 않은 초심자에게도 대여를 해주는 것을 마케팅 포인트로 삼는지, 매일의 아침마다 어설프고 조금은 위험해 보이는 초보 운전자들이 직원에게 주행법을 배우곤 했다. 위태로운 운전자들의 주행을 보고는 이 곳에서는 오토바이를 잘 피해서 다녀야겠다- 라고 스스로 되뇌었다.
빠이에서 가장 많이 생긴 것이 아마도 바이크 렌탈샵이 아닐까 싶은데 개인적으로는 이 것이 빠이의 지형도, 느린 걸음으로 십여분이면 마을 안에서 대부분의 이동이 가능했던 이전의 관광 형태를 완전하게 바꾸어 놓은 것으로 생각된다. 빠이의 주변에는 예전부터 반나절 또는 당일 코스로 여행할 만한 거점들이 꽤 많기도 했지만 마을 자체가 주는 특유의 아늑함과 분위기 덕분에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그러나 늘어가는 여행자들로 점점 더 포화 상태가 되어가는 마을은 스스로 수용할 수 있는 관광객의 범위를 넘어섰고, 이에 주변으로의 여행은 거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특히나 익히 듣던 대로 중국인 관광객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정말 많은 수의 샵과 식당, 거리에서 중국어가 혼용된 간판과 메뉴를 볼 수 있었다. 커브와 경사로 악명이 높은 치앙마이-빠이-매홍손 구간이지만 마을 부근으로는 거의가 외길인 데다가 속도를 높이지 않으면 크게 위험할 이유는 없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바이크 렌탈의 공급은 수요를 따라 가파르게 증가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역적 문화의 특수성과 다양성에 기호가 있는 여행자로서, 편중된 도시와 관광의 모습에 조금 씁쓸한 미소가 났다. 다시 한번 좋은 것이 비단 나한테만 좋은 것이었을 리가- 라고 스스로에게 되물어 본다.
시원하고 적절한 오전의 날씨는 마을을 거닐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간밤의 그 많던 여행자들은 어디로 갔는지, 잔잔한 마을은 여전히 좌우로 길게 늘어선 가게들을 제외하면 예전의 향수가 조금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점심을 먹을 생각으로 식당을 찾으려던 차에 어제 인근의 산 정상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를 다시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먼저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어어, 어디 가세요!"
"저요? 그냥 돌아다니고 있어요. 식사하셨어요?"
"아니요. 아직.."
"같이 점심 드실까요?"
K군은 어제도 오늘도 나시를 입고 커다란 근육질의 몸매를 자랑하는 건강한 체격의 여행자다. 어떻게 자기를 알아봤냐고 물었는데, 어깨가 하도 태평양만큼 넓어서 못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할 그런 사람이었다. 함께 식사를 하기로 하고 그가 머무는 숙소 근처로 향했다. 자주 가는 밥집이 있다고 한다. 여행자의 쿨함(이라는 코스프레)은 어떤 선택에도 반하지 않는, 어떤 의식적(무의식 아님) 자연스러움에 있기 때문에 그의 정중한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1도 없었다. 나는 아주 쿨한 여행자다. (라고 의식적으로 믿고 산다)
여행자가 굳이 나서서 찾지는 않을 것 같은 로컬 식당, 그리고 매일 같다는 메뉴의 주문으로 그의 성격을 대강 짐작해보았다. 식사를 하고 우리는 이어서 커피를 마시러 자리를 옮겼다. 두 남자의 대화는 끊김이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여행에 대한 동경과 동시에 현실에 대한 인식의 동질감이 서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연식이 내가 조금 더 오래되었는데 그에 따른 존중인지 대체로 K가 묻는 질문에 내가 답변을 하고, K가 좀 더 깊은 고민을 털어놓는 형식이었다. 참고로, K의 넓은 어깨는 도 대표까지 할 정도의 수준급 수영실력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짜세(?)였으며, 현재는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장기간 세계일주를 위해 길을 떠나 있는 여행자였다.
누구나 부러워할 법한 여행, 그것도 1년에 가까울 정도의 기간 동안을 (일도 안 하고) 여행만 하는, 현역의 여행자. 그런 그와 내가 나눈 이야기는 사실 매우 진솔한 것들이었다. 점점 심도와 밀도가 더해가는 대화 속에 우리는 첫 만남에서부터 3차를 가기로 하고 자리를 다시 옮겼다.
내가 맨 처음 빠이(Pai)를 찾았을 때 친구인 Y와 함께 묵었던 숙소가 아직도 있을지 궁금하여 개울가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어느새 호칭이 '형'으로 바뀐 나의 리드를 K는 흔쾌히 따라주었다. 아, 맞다. 골든 헛!(Golden Hut) 추억의 장소는 이름도 그대로, 당연히 자리도 강가 바로 앞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내부의 방갈로가 몇 개 사라지고 그 자리에 조금 더 큰 건물이 생기기는 했지만 개울가에서 리셉션, 다시 방갈로로 이어지는 그 특유의 평화로운 분위기는 여전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으므로 주인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 같았다.
현재의 숙소는 아니었지만 사정을 설명하고 리셉션의 테라스에 K와 앉았다.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를 두 병 꺼내어 계산하고는. 연신 고맙다고 정중하게 인사하는 동생을 보면서, 이내 즐거운 마음이 되었다. 여행이 별 거랴. 매번 여행을 하고, 글을 쓰고, 또 생각을 고쳐도, 거기에 항상 사람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었다.
K의 질문과 고민은 대체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였으며, 매우 자연스러운 내용들이었다. 사실 본인(쿨한 여행자)도 꼭 같은 고민을 했고, 여전히 길 위에서 답을 찾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정답이다'하는 말을 내어주지는 못했지만 오히려 그 편이 K에게는 더욱 공감이 되고 위안이 되었으리라.
아무도 (사서) 읽지 않는 '여행자의 삶'이라는 책*을 내어두고 '나=여행자=나'라는 아이덴티티(Identity)로 살아가고 있는 답이 없는 인간(하지만 혼자 답정너)이지만, 인간적인 고민은 매 한 가지다. 바로 먹고사는 일. 지독히도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꿈이라는 것은 언제고 생존에 앞서기는 매우 힘든 일이다. 최소한 범인의 상식으로는 그렇다.
근묵자흑(近墨者黑; 끼리끼리 모인다)이라는 말처럼 주변에도 많은 수의 여행자, 세계일주자, (여행) 콘텐츠 에디터가 즐비하다. 이 업계(?)에서도 소위 여전히 현역도 있고, 은퇴자도 있고, 떠오르는 샛별도 있다. 근래 '여행'이 주는 의미와 그 유행의 민감도가 하도 대단하여 일개(一介) 글쟁이가 함부로 떠들기 힘든 이슈지만, 사실 나와 내 주변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가 않다. 세계일주 혹은 어떤 특정한 스케일(Scale)의 여행, 이라는 성취를 가지고도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는 지극히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요구되는 직업적 소명의식과 전문성은 이런 것들과는 또 다른 노력에 따라서 쌓이고 평가되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그런 삶을 지향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나는 당연히 그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이것을 두고 꼰대의 척도라고 말한다. 글쎄-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여행자들, 지구를 한 바퀴나 두 바퀴씩 돌고 돌아도, 인간으로의 한계와 삶에서 느끼는 감정들은 대체로 비슷하다. 여행은 줄 세우기가 아니다. 우리는 여행부심으로 점철되어 살 필요도, 또는 그런 소모적인 것들로부터 상처받을 이유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오히려 서로를 높은 수준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포옹력과 사랑이 필요하다. 길 위에서 이 것을 배우지 못하면 그나 그녀의 여정의 범위가 얼마나 대단하던, 역설적으로 나는 그들을 '실패한 여행자'로 각인한다.
분위기와 대화에 취해, 맥주 한 병만으로도 금세 얼굴이 붉어진 나는 K에게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사실 무엇을 하든 좋아. 우리에겐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잖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 스스로에게부터 솔직한 것. 이걸 쫓으면서 저걸 부러워하는 건 치사한 거야."
"현실적인 고민은 다 같은 거니까.. 지금은 꿈을 좇기로 한만큼, 당분간은 그냥 이대로 열렬히 달리자."
서로 '본인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공동의 목표로 삼고 마지막 건배를 나눴다. 그렇게 낯선 두 여행자의 간지러운 반나절의 대화가 고요한 가운데 또 폭풍처럼 지나갔다. 서로 많은 말을 뱉어두고 또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각자의 남은 오후를 향해 헤어졌다.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가 인연에 사로잡혀 반나절을 쏜살같이 보내고 나니 어느새 해 질 녘이 다가오고 있었다. 특별히 무언가를 하기에는 촉박한 시간이었으므로 오늘은 K와의 주옥같은 대화를 가장 큰 성과로 삼고 석양을 보기 위해 가까운 고지(高地)를 찾았다.
거대한 흰 부처상이 있는 매옌(Mae Yen) 사원은 빠이의 중심부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있다. 숙소로 돌아가서 바이크를 타고 가니 채 십 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에 비해 높은 계단 위로 설치된 거대한 불상과 그 탑이 마을과 산세, 석양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게 해주었다. 사원에 도착했을 때부터 계단에 한 걸음 오를 때마다 빠르게 지는 석양과 오래간만에 계단을 오르는 나의 숨 가쁜 속도전이 잠시, 이내 꼭대기 층에 오르니 사람들이 삼삼오오 자리하고 앉았다. 나도 얼른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숨을 고르고 멀리 산등성이에 걸친 해를 내다본다.
석양이 지고도 뭔가 아쉬운지 부처의 발 밑에서 눕방(?)을 펼치는 여행자들을 조금 구경하고 다시 마을로 돌아간다. 매홍손에서 세바스티앙이 빠이에 가거든 꼭 찾아가라는 파라다이스(Paradise) 바에 잠시 들러보았다. 분위기를 보니 과연 녀석이 좋아할 만한 곳이었다. 그의 귀띔으로는 이 곳에서 만드는 버섯 주스(?)가 대단하다고 하다. 참고로 메뉴판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여행자들과 한데 어우러져 포켓볼 한 게임을 치고 허기가 지다는 핑계로 자리를 빠져나왔다. 분위기 상 아무래도 계속 있다간 술을 많이 마시게 될 것 같아서 다음에 바이크를 두고 걸어서 오기로 한다. 이 곳의 위치가 꽤나 안쪽에 위치한 데다가 진입로의 노면 상태가 매우 고르지 못했다.
숙소에 바이크를 두고 다시 워킹 스트리트로 걸어나와 수제 햄버거집을 하나 찾았다. 사람마다 입맛 취향이 다를 텐데, 나는 애기 입맛에 더하기 양식 취향이라, 여행을 나와도 곧잘 햄버거를 찾아 먹는다. 맥도날드의 유무는 여행 목적지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꽤나 주요한 요인이라-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 꼭 떡볶이, 한식 반찬이 그립니다. 몸은 거짓말을 잘 하지 않는다.
저녁을 먹고 K에게 다시 카톡이 왔다. 자기 전에 맥주라도 함께 한잔 할 요량으로 그를 다시 만났다. 바를 몇 군데 돌아보았으나 긴축 중인 K군의 예산을 고려하여 그냥 편의점에서 맥주를 사서 숙소 옥상으로 가기로 한다. 후텁한 에어컨 실외기 공기가 가득한 옥상에서 별이 보일 듯 말듯한 빠이의 밤하늘을 이따금 쳐다보면서 여행자의 수다를 이어간다. 낮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에너지와 열정이 넘치는 K의 두 눈을 보며, 청춘이 조금은 그리운 그런 밤이 되었다.
총 주행거리: 6.1KM
숙소 정보: Baan Kon Pai (아고다)
+) 휴식. 10KM도 채 주행을 하지 않았다.
-) 빠이의 변화에서 느끼는 이질감.
=) 듬직한 동생 K를 만남. 두 남자의 반나절 데이트.
&) 오늘의 OST-
* A Traveler's Life (부제: 여행자의 삶)
http://www.yes24.com/24/goods/638043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