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좋아한다. 소설을 읽다 보면 태생이 힘겨운 아이와 환경이 어지러운 사람들, 구멍이 뻥 뚫린 삶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내 마음이 배배 꼬인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살만하고 행복하다고 단순하게 결론짓지 않는 그 글들이 참 좋다. 쉽게 타협하지 않고 정신없이 흔들리고 결코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글들 속에서 쉼을 얻기도 한다. 늘 가장자리의 삶이 궁금했던 건 나 또한 위태로운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둘째를 낳고 여전히 '나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모르던 시절, 한 친구를 만났다. 그 당시 우리는 인생 공동체로 만나 쉽사리 가까워질 수 있었다. 한 손엔 여전히 어린 첫째를 다른 한 손엔 기저귀 가방을 그리고 어깨에는 아직 걷지 못하는 둘째를 들쳐 매고 미래가 없는 여자들의 현실에 대해 한탄을 하며, 우리는 그렇게 힘든 시간들을 함께 흘려보냈다.
단지 우리의 차이라고 한다면 일의 유무에 선을 그어놓고 서로 다른 영역에서 살았다는 것. 나는 돌아갈 회사가 있었고 친구는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선은 도대체 누가 그은 것일까. 세상이 정해놓은 옷들이 내 옷이라 착각하며 서로의 환경이 다르다고 생각했던 그때, 우리는 조금 다른 옷을 입었지만 같은 사람이라는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다운 삶'이라는 탈출구를 찾아 헤매는 미로 속 엄마들이라는 것.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는 같이 헤맸고 흔들렸고 행복하지만은 않다고 나눴던 솔직한 마음들이 있었기에 서로를 바라보며 힘을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 <마흔, 엄마가 꿈꾸는 나이>에는 그때 만났던 친구의 다사다난한 삶과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쩌면 너무 희망적일 수도 혹은 너무 쉽게 이겨낸 친구의 이야기로 읽힐 수 있겠지만, 사방이 막혀 꼼짝달싹 못했던 친구의 지난한 과거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 글들을 빠르게 읽지 못하고 문장 사이에서 잠시 뜸을 들이며 함께 그 시간들을 지나쳤다.
참 힘들었구나, 자신이 할퀸 상처로 많이 아파했구나, 흔들림 앞에서도 주저앉지 않으려고 노력했구나, 여리기만 할 줄 알았는데 참 단단하구나.
인생의 의미를 과거의 우물에서 길어내지 않고 지금을 부단히 살아내려는 친구의 이야기는 그 어떤 소설보다 나에게 힘과 위로를 보태주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글을 쓰며 더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길. 여전히 위태로운 삶을 살고 있지만 나 또한 그 길을 함께 걸어야겠다는 생각도 보태본다.
글을 쓰면서부터 주변의 소소한 것들이 새삼 달라 보이는 경험도 하고 있다.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더 좋은 글감과 표현을 고민하는 자세로 주변 것들을 본다. 천천히 모양을 바꿔가며 움직이는 구름을 따라가는 일이 재밌고, 이른 여름 갑자기 피어난 장미 한 송이가 기특하다. 고요한 새벽 마룻바닥에 발바닥을 내려놓을 때 느껴지는 한기를 사랑한다. 모르고 지냈던 행복들이다.(p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