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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상실의 무게(1779년)

SF사극 《시간을 품은 달》 - 감정을 배우는 AI 호위무사 '율'

by 엄태용


봄이었다.

창덕궁의 매화가 흩날렸다. 꽃잎들이 바람에 실려 연못 위로 떨어졌다. 물결이 일었다가 잠잠해졌다. 흰 꽃잎들이 수면에 떠 있었다. 마치 작은 배들처럼.

원빈 홍씨가 쓰러진 것은 그런 오후였다.

정조는 서재에서 율과 함께 있었다. 『자휼전칙』에 대한 마지막 검토를 하고 있었다. 고아가 된 아이들을 위한 법. 버려진 생명들을 구하는 일. 정조의 손끝이 한지 위를 따라 움직였다.


"전하."

율의 목소리가 조용했다.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푸른빛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무엇이냐."

"궁 안에서 이상 징후가 감지됩니다."


율의 내면에서 데이터가 흘러갔다. 심박수. 체온. 호흡 패턴. 모든 수치가 비정상이었다. 정확한 위치는 파악할 수 없었다. 마치 안갯속에서 빛을 찾는 것 처럼.

그때였다.

문이 열렸다. 나인이 뛰어들었다. 얼굴이 창백했다.


"전하, 원빈 마마께서..."

정조의 붓이 떨어졌다. 먹물이 종이 위에 번졌다. 검은 점이 퍼져나갔다.

원빈의 처소는 고요했다.

너무나 고요했다.

정조는 문턱에 서 있었다. 발을 들일 수가 없었다. 율이 곁에 있었다. 은빛 갑옷이 촛불에 반사되어 희미하게 빛났다.


"들어가십시오."

율의 목소리였다. 낮고 조용했다.

정조가 고개를 돌렸다. 율을 바라보았다.

"저 안에서... 죽음의 냄새가 나는가."

"..."


율은 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정조는 천천히 들어갔다.

원빈 홍씨가 누워 있었다. 얼굴이 하얗게 달아올랐다. 열병이었다. 갑작스러운 병이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웃고 있었는데.

"마마."

정조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뜨거웠다. 너무 뜨거웠다. 마치 불덩어리 같았다.

원빈의 눈이 떠졌다. 흐릿했다. 정조를 알아볼 수 없는 것 같았다.

"전하..."

작은 목소리였다. 바람보다 작았다.

"여기 있다. 곁에 있다."


정조의 목소리가 떨렸다. 왕의 위엄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그저 한 사람을 사랑하는 남자였다.

율이 문가에 서 있었다. 그는 원빈의 생체 신호를 분석하고 있었다. 수치들이 그의 의식 속에서 흘렀다. 심박수 불규칙. 체온 상승. 혈압 하강.

결론은 명확했다.

죽음.

그러나 율은 그 결론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인간의 희망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사흘이 지났다.

정조는 원빈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정조 뒤에 서서 조용히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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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주로 '영상화'를 목표로 사람과의 유대감이 담긴 'SF소설'을 씁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불완전한 존재들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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