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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백성의 질병

SF사극 <시간을 품은 달>

by 엄태용

창덕궁에 비가 내렸다. 여름의 끝자락, 무더위가 가시지 않은 채로 내린 비였다. 빗물이 처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돌담 위로, 연못 위로, 세상은 회색빛으로 젖어갔다.


정조는 창가에 서 있었다. 비 내리는 뜰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깊었다. 평소와는 다른 무게가 그 안에 서려 있었다.

"전하."

율이 다가왔다. 발걸음은 언제나처럼 조용했다.

"한성에 괴질이 돌고 있다더냐."

정조의 목소리가 낮았다. 빗소리에 섞여 들렸다.


"그러하옵니다."

율은 답했다. 내면에서 푸른 파동이 일었다. 데이터가 흘렀다. 숫자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 숫자들 사이로, 무언가 다른 것이 스며들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백성이 죽어가고 있느냐."

"지난달부터 이달까지, 한성부에서만 사백여 명이..."


율의 말이 끊어졌다. 사백이라는 숫자가 그의 입 안에서 맴돌았다. 사백. 한 명, 한 명이 모여서 이루어진 사백. 각각의 생명이 지닌 무게를 그는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정조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율을 바라보았다.

"네가 보는 세상에서는 질병을 어떻게 막느냐."

율은 침묵했다. 그의 의식 속에서 정보가 흘렀다. 백신, 항생제, 격리 프로토콜. 수백 년 후의 의학 지식이 그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지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미래에는... 질병의 원인을 미리 알 수 있사옵니다."

"미리?"

"질병을 일으키는 것들이 무엇인지, 어떻게 퍼지는지. 그것을 막을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정조의 눈빛이 흔들렸다.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그 안에 서렸다.

"그렇다면 지금 이 괴질도..."


율의 내면에서 데이터가 소용돌이쳤다. 1786년 여름, 한성부에 창궐한 질병. 증상 분석, 전파 경로 추적, 치사율 계산. 모든 정보가 그의 의식 속에서 교차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사백여 명의 죽음 뒤에는 그들의 가족이 있었다. 사백여 개의 슬픔이 있었다. 사백여 개의 무너진 삶이 있었다.

"전하."

율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자신도 놀랐다. 목소리가 떨리는 이유를 그는 알 수 없었다.

"이 질병은... 물과 관련이 있사옵니다."

"물?"


"오염된 물을 통해 퍼집니다. 그리고... 술을 빚는 과정에서도."

정조가 몸을 돌렸다. 율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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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주로 '영상화'를 목표로 사람과의 유대감이 담긴 'SF소설'을 씁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불완전한 존재들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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