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엄마의 꿈을 꾸었다.
아침부터 엄마가 너무 그리워, 예전 엄마와 통화를 할 때 녹음해두었던
엄마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엄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눈물이 나서,
황급히 화장실로 가서 이어폰을 꼽고 조심스레 녹음을 켜본다.
돌아가시기 2달 전 무렵 통화한 내용이다.
그때도 많이 힘드셨는지, 목소리에 힘이 없다.
그러나 세상 그 무엇보다도 반가운 엄마의 목소리다.
그리운 엄마의 목소리와 함께 엄마의 얼굴도 떠오른다.
주름살 깊게 패인 얼굴과,
이제는 탄력을 잃고 자글자글해진 손바닥.
가만히 있어도 마치 눈을 감은 듯한 늘어진 눈 밑 살들
자식들을 위해 억척스러운 삶을 살아오신 어머니
억척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본다.
억척 : [명사] 일을 해 나가는 태도가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몹시 모질고 끈덕짐.
나는 어머니의 억척스러움을 생각할 때면 늘 눈물이 났었다.
이를테면 이런 일들이 있었다.
지방이 고향이었던 우리는 추석날이나 설날 같은 큰 명절 무렵이면 고향에 가기 위해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했다. 당시 차가 없었던 우리 형편으로서는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가야 했었고, 우리 부모님은 아직 어린 자식 3명을 이끌고 버스표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시곤 했다. (그 당시는 예약 시스템이 없고, 정류장에서 표를 구해야 했다. 자동차가 지금처럼 대중화되어 있지 않아서 버스표 구하는 것은 전쟁과도 같았고 암표 판매상도 정말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번은 고속버스 정류장에서 어떻게든 표를 구하려고 하셨으나 결국 구하지 못했었다. 이제 시골에 가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될 무렵, 어머니는 시골로 가는 한 버스를 부여잡고, 입석으로라도 태워달라고 사정을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막무가내로 떼를 쓴 것은 아니고, 자리가 3개가 남았는데, 우리는 5명(어른둘 아이셋)이므로 그 버스를 탈 수 없었던 것인데, 그 남은 자리에 우리 꼬맹이들을 앉히고, 엄마와 아빠, 당신들 두분은 버스 가운데 통로에 앉아가겠단 심산이 분명하였다. 당연히 그 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들은 가운데 통로에 사람들이 앉겠다고 하면 좋지 않을 것이 분명하였고, 버스기사라든지 버스 회사 입장에서도 사람이 가운데에 앉아 가다가 사고라도 나면 자신들이 책임져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거절을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시골에 못 가게 되는 것인데, 이때 어머니가 나서서 버스기사에게 계속 사정하고 애원하기 시작하셨다.
어떻게 보면 웬 아줌마가 정해진 룰을 지키지 않고, 자기네들의 편의를 위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며 정당한 업무를 방해하는 것인데, 자식들로서도 우리의 어머니가 이렇게 행동을 하시는 것이 부끄러웠고, 한바탕 촌극을 벌이고 있음을 슬며시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끄러움. 민망함. 이 시간이 얼른 지나갔으면 하는 그런저런 생각들.
그렇지만 결국 그게 통하여,(그 당시에는 버스 입석이 꽤 많았던 시기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 무렵이다.) 우리는 버스 가운데 통로에서 혹은 빈자리에서 간신히 앉을 곳을 마련하여, 그 귀향길 북새통에 간신히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도착해서야 어머니 덕분에 내려올 수 있었다가 감사해할 수 있었던 것인데,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의 그 억척스러움이 남편과 꼬마 3명을 데리고 시골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버스 기사님께는 당연히 죄송할 뿐이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는 어릴 때 형편이 좋지 못해 지하단칸방에서 시작을 했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억척스러운 노력과 희생으로 조금씩 형편이 나아져서, 단독주택 지하실에서 2층으로, 단독주택에서 빌라로, 그리고 빌라에서 아파트로 조금씩 이사를 할 수 있었다.
예전 단독주택 2층에서 살았을 무렵의 일화가 하나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집이 참 이상했던 것이 지금이야 각각의 세대별로 전기 계량기가 있어서 전기 요금이 따로따로 부과되지만, 그 집은 1층 주인집을 제외하고, 2층 우리집과 지하에 여러 세대가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계량기가 하나만 있어서 주인댁에서 전기료를 일괄 나눠서 각 세대에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우리 집은 전기세를 상당히 절약하고 조심스럽게 쓰는 편인데도, 이상하게 전기세가 상당히 많이 부과되어 나왔고, 오히려 더 넓은 평수의 주인집은 전기세 요금을 거의 내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집 같은 경우 예전에 살던 집보다 거의 3배가 넘는 전기 요금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즉, 주인집은 집 전체의 전기세 요금에 대해 자기들 마음대로 요금을 분배할 수 있었던 것인데, 지금처럼 임차인이 보호받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던 30여년 전 당시만 해도 임차인 중에 이것에 대해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 최초로 강하게 반기를 든 사람이 우리 어머니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주인댁에 강하게 각 세대마다 계량기를 설치할 것을 요구하였고, 당연히 지금까지 전기세의 상당부분을 세입자들에게 전가시켜왔음이 분명한 주인집은 거세게 반발하였다. 결국 주인집과 어머니 사이에 한바탕 전쟁이 벌어진 것인데, 종국엔 목소리 크고, 부끄러움을 이겨낸 어머니의 승리로 결론이 났다. 다만 계량기 설치 비용은 우리 집이 부담하는 방식으로 설치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전기세가 상당히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 나왔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그 당시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우리는 2층에서 떨고 있었고, 어머니는 혼자 주인집 마당에서 일대 다수의 싸움을 홀로 하고 계셨다. 절대 각 세대 계량기 설치는 안된다는 주인집 아저씨에게 온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대고 분노를 표출하는 어머니 옆에는 응원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고, 우리들은 2층 구석진 곳에서 귀를 막고 때론 부끄러워하며 때론 민망해하며 조용히 움츠려 있었다.
어머니 덕분에 계량기를 설치하고 전기세가 합당하게 나왔건만, 그 당시에 우리는 어머니를 부끄러워했다. 어머니는 오히려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행동하셨건만 자식들은 우리는 오히려 어머니를 부끄러워했던 것이다. 혼자서 적진에서 다수, 그것도 강자를 상대로 어머니는 무슨 생각으로 맞섰던 것일까? 자식 3명 데리고 머나먼 서울에서 아버지 혼자 벌어오는 돈으로 키워나가면서 어머니에게는 억척스러움이 몸에 배셨다. 그 억척스러움이 지금껏 우리들을 떠받치고 끌어오셨고, 언제나 어머니는 우리들의 큰 우산이셨다.
그랬던 어머니가 어느새 늙으셨고,
결국 병마와 투병하다 눈을 감으셨다.
돌아가시기 1년 전 무렵,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예전만큼 본인의 의견에 대해 큰 소리를 내지도 못하시고, 손자의 재롱에 얼굴 가득 미소를 띄는 할머니가 되었다. 손자가 잠들면 옆에서 같이 주무시며 손자가 행여 깰까봐 다독이는 모습은 어린 시절 우리를 품어주던 엄마의 모습이 그대로 묻어 있다. 우리 기억 속에 어머니는 참으로 억척스럽고도 강한 모습이었다.
그 어머니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고맙고, 그 때의 젊은 어머니의 모습이 새삼 그립다. 그 당시 나는 우리 엄마는 뭐든지 해낼 수 있는 슈퍼우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머니의 억척스러움 옆에 서서 어머니를 응원할 수 있을까?
엄마를 부끄러워했던
철없던 어린 시절의 내가 미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