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몰락(沒落)
현우의 말을 들은 영준은 도대체 이 상황에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방금 전까지 수익률 19%와 수익률 8%에 대해 분노를 토해내고 있던 영준과 준규였다. 그 두 사람 앞에 모든 것을 다 잃은 현우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면서 영준은 순간 섬뜩해졌다. 내 앞에 있는 현우의 상황이 자신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만약 자신이 현우처럼 코인을 몇 시간만 늦게 팔았더라면 자신 역시 모든 것을 허공으로 날려버렸을 것이다. 그 몇 시간이 우리 중 한 명을 지옥에 보낸 것이다.
준규도 표정이 심각해졌다. 오전에만 팔면 된다고 말한 것은 분명 그였다. 물론 그도 투자 정보를 얻고 있는 형님에게서 들은 것을 전달한 것 뿐이지만, 그럼에도 현우의 상황이 너무 가혹하다.
모든 것을 허공에 날린 그에게 도대체 어떻게 말을 건네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내가 만약 현우의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준규 역시 이런 생각을 하니, 순간 온 몸의 피가 곤두서는 느낌이다.
처음으로 코인 투자에 대해 투자가 아닌 도박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것도 모 아니면 도의 도박. 지금껏 승리만 생각을 했다. 반드시 이기는 승률 100%의 투자라고 생각을 해왔는데, 지금 처음으로 패배를 경험한 사람을 보았다. 그리고 한번의 패배는 모든 것을 잃게 한다는 것도 보았다.
당사자인 현우는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차라리 죽음으로서 이 모든 것이 해결된다면,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 그러나 부모님이 계신다. 부모님의 돈 2억5천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다. 게다가 자신이 없으면 대출금 2억 또한 부모님에게로 넘어갈 터였다.
현우는 횡설수설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지금이 몇시인지, 그리고 왜 지금 자기가 여기 있는지도 순간순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지금 현우는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현우는 남중과 남고를 졸업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몰랐지만, 대학교에 가서 자신이 꽤나 잘생겼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음을 알게 됐다. 그간 많은 여자들을 만나왔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식으면 다시 괜찮은 여자애들로 갈아탔다. 이상하게 현우가 가서 몇 번 대화를 해주면 여자애들은 현우에게 쉽게 넘어오곤 했다. 때로는 울면서 매달리는 여친을 냉정하게 차면서 원망어린 말들을 듣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남의 마음이나 기분따윈 내 알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많은 여자를 만나 오면서 상대와 대화하는 방법을 익힌 것은 현우만의 큰 무기였다. 상대의 말에 공감하는 방법을 알았고, 어떻게 하면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잘 알았다. 그리고 그 무기는 회사에 나가서도 유용했다. 회사에서도 다들 자신을 좋아했다. 여친과 헤어지면 연락을 달라는 동료도 있었다. 대놓고 번호를 주고간 사람도 있었다. 현우는 잘생긴 외모와 키가 자신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현우에게 부모님은 사실 아킬레스 건이다. 다른 사람들은 현우의 귀티 나는 얼굴을 보고 다들 잘 사는 줄 안다. 그러나 사실 현우의 집은 가난하다. 부모님은 송파에서 조그만 식당을 하시고, 식당에 딸린 작은 방이 현우의 집이다.
현우는 어릴 때부터 집에 친구들을 데리고 간 적이 거의 없다. 멋모르고 친구를 처음 집에 데려왔을 때, 깜짝 놀라던 친구의 얼굴이 아직도 현우의 머릿속에 선하다. 귀티나던 현우의 얼굴을 보고 잘살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막상 현우의 집을 보자 사실은 현우가 무척 가난했음에 놀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현우는 단 한번도 친구를 집에 데려오지 않았다.
대학교에 가서도 여자친구를 한번도 집에 데려간 적이 없다. 다만, 어디 사냐고 물어보는 친구들의 말에 송파라고 말했더니, 송파는 잠실인줄로 아는 친구들 사이에서 잠실에 사는 아이가 되어 버렸다. 졸지에 잠실에 살고 있는 부잣집 아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시장에서 파는 만원짜리 바지를 입어도 친구들은 현우가 비싼 명품을 입은 줄로 알았다.
그러나 현우의 마음 속에는 큰 구멍이 하나 있었다. 그 구멍은 현우가 가난이라는 진실을 잘사는 척하며 숨기는 동안 점점 더 커져갔다. 그래서 현우는 주변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면서 웃고 떠드는 것으로 그 구멍을 메워갔는지도 모른다.
현우 역시 부자가 되는 것을 늘 꿈꿨다. 그래서 일찍부터 투자의 세계에 눈을 떴다. 아르바이트비를 모아 그 돈으로 주식 투자도 하였고, 적은 돈이지만, 코인에 투자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수익이 대단치 않았다. 설령 이익을 냈다 해도 워낙 소액이라 소소한 용돈벌이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마음 속에는 언젠가 큰 부자가 되고 말 것이라는 야망이 가득차 있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고, 그런 자신을 스스로 응원하며 지금까지 달려온 터였다.
그래서 이번에 어떻게 해서든 위로 올라가고 싶었던 것이다. 공기업 정규직의 신분을 이용해서 대출을 최대한으로 받고, 평생 식당일을 하며 모아온 부모님의 노후자금 2억 5천을 빌렸다. 걱정하며 돈을 내주기를 망설이는 부모님께 단 한번만 자식을 믿어보라며 큰 소리를 쳤었다. 현우가 오늘 날린 돈은 바로 그 돈들이었다.
현우는 고개를 떨구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당장 집에 가서 부모님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영준과 준규 역시, 그저 같이 고개를 떨구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