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국어교육론 강의 시간이었습니다. 제 단짝인 형이 발표하는 시간이었지요. 제 단짝은 발표 중 글귀 하나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글귀는 쇠귀 선생의 '함께 맞는 비'였지요.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나이 서른이 되어서야 이 글귀를 다시금 곱씹어 봅니다. 이 글귀는 공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자각하게 합니다. 쇠귀의 말씀처럼 누군가를 도우려는 동기가 정략적으로, 상략적으로, 향락적으로 흐르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동기로 시작된 공감은 오히려 관계를 상하게 합니다.
공감을 위해서는 타인의 입장이 온전히 되어보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을 얻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타인의 고통을 나도 함께 겪어 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뭇사람들은 입으로 공감하지요. 제대로 된 공감은 입이 아닌 발로 하는 공감입니다. 함께 타인의 땅을 밟는 것에서 시작되는 공감이 참된 공감이 되어 누군가의 위로가 되어줄 수 있지요.
그러나 그 수많은 사람들의 입장이 완벽하게 되어보는 일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토록 제대로 된 공감 한번 못하고 고립된 채 살아가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는 선행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공감의 싹으로 자라날 수 있다 생각합니다.
몸 없는 성자들의 말을 믿지 말라
김선우 시인은 '햇봄, 간빙기의 순진보살'이라는 시에서 말합니다. '몸 없는 성자들의 말을 믿지 말라'라고 말입니다. '말씀만으로 아름다워진 세상'은 없습니다. 공감에서 우리가 멀어지는 이유는 말로만 떠들기 때문입니다. 작은 실천이나마 이루어 내려고 한다면 우리는 공감에 가까워질 수 있겠지요. 그것이 무엇이든 좋습니다. 그러나 실천에 대한 대가를 바라게 된다면 그것은 무용합니다. 득실을 따지는 마음은 공감을 마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자본주의를 따르는 현대 사회에서는 비효율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것을 내려놓고 주는 것은 곧 낭비이고, 이는 도태이지요. 그래서 현대 사회에서는 가난을 외면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비효율적인 존재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인간을 성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강신주는 강의에서 자녀 중 공부 못했던 아이들이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합니다. 공부를 못하는데도 똑같이 밥을 주고 키웠기 때문이라며 말입니다. 반면, 조건적인 사랑은 사람을 괴롭게 하지요.
그래서 요즘 문화를 보면 조금 갑갑하게 느껴집니다. 친구들끼리 만나면 천 원, 만 원 단위까지도 낱낱이 나누며 더치페이를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만큼 내게 도움이 되느냐에 따라,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이런 조건적인 사랑이 보편화된 요즘. 비효율과 낭비를 감내하는 공감으로의 인간적인 발걸음 하나는 만들어 봐야 하지 않을까요? 공감은 실천을 넘어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