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맛

할머니의 오랜 습관

by 이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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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월을 기다리고도 또 누군가를 기다리고 계신 외할머니의 오랜 습관


"수박은 다 드싰어예?"

"누가 와서 물랑가 했디만, 아무도 안 와서 썩카 내삐맀다."

어머니의 물음에 무심히 답하시는 외할머니의 말에 덜컥 마음이 묵직해집니다. 한 세월을 기다리고도 또 누군가를 기다리고 계신 외할머니의 오랜 습관. 지난주에는 또 자연산 전복을 4마리 사놓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4마리가 10만 원이라고, 자연산이라고 덧붙이시면서 얼른 먹으라셨지요. 그래서 오랜만에 10명 정도 되는 외가 식구들 오순도순 모여서 전복 4개를 나눠 먹었습니다. 그마저도 어른들은 사촌 동생들 많이 먹으라며 양보하셨지요.

"어서 무라. 내는 마이 뭇다."

그렇게 기다리는 습관을 갖고 계시면서도, 우리가 밥을 먹을 때는 '어서'라는 말을 붙이십니다. 열무김치도 먹고, 된장도 먹고, 닭백숙도 '어서어서' 먹으라고 하십니다.



"이제 할매도 다 됐는갑다."


"시상에 니 아부지는 내 만나러 온다믄서 소괴기는 무슨, 고등어 봉다리 털레털레 들고 오데."

그때부터 외할머니는 고등어를 싫어한다고 하십니다. 외할머니에게 고등어는 딸의 결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할머니의 시선에서는 아버지가 달갑지 못한 모양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딸내미를 데리고 가서 고생시킨다고 말입니다. 할머니는 늘 저희 아버지를 미덥지 못해 하십니다. 대학도 나온 사람이 힘든 일을 하면서 산다며, 영특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면서요. 몸을 덜 쓰는 일을 했으면 하시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에 대한 걱정도 티 안 나게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소라죽을 홀로 끓여드셨다고 하셨습니다.

"니가 할매 아프다꼬 전복죽 끼리준 기 생각나가 뭇드만, 그 맛이 안 나데."

옛날에 제가 외할머니께 전복죽을 끓여드린 적이 있었나 봅니다. 어떤 기억들은 잘 닦인 유리창 같아서, 만지면 닿을 듯이 그때 모습을 비추기도 하지요. 아픈 날에 간병해 주었던 사람은 이런 기억들로 남게 되지요. 그러고 보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해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지난주에는 할머니께 문득 무릎을 힘겹게 누르고 일어서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할매도 다 됐는갑다."

그리고 이내 옅은 미소 같은 걸 비추셨습니다.

"아이다. 그래 말하지 마이소."

제 한 마디는 외할머니의 미소 앞에서 힘을 잃었습니다. 할머니는 어떤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아마 손주 당황시키려 한 말씀은 아닐 겁니다. 다만 욕심이 씻긴 미소와 말이었던 것은 틀림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살았던 세월이 당신에게 조금씩 나타나고 있음을 알고 계셨던 걸까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할머니께서 담그신 장을 한 바구니 가득 챙겨 왔습니다. 할머니께서 주시는 된장은 참 깊은 맛이 납니다. 시중에서 파는 된장이 할머니 된장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기다림이 부족하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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