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벌레 사냥

김선욱, '한나 아렌트와 차 한 잔'

by 이여름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영화에서 영탁이라는 인물은 내게 질문을 던진다. 영탁은 서울 자가를 소유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만, 사기로 돈을 다 잃고 결국 살인을 저질러 황궁 아파트 세입자가 된다. 그러다 재난이 닥치고 황궁 아파트만 남게 되어, 아파트 입주민만의 '유토피아'가 세워진다. 황궁 아파트의 식량이 나날이 줄어가자 영탁은 입주민이 아닌 사람들을 '바퀴벌레'라며 내쫓기 시작한다. 스스로 또한 위장한 존재, 즉 결핍이 만들어낸 존재인데 더욱 잔인하게 '바퀴벌레'들을 잡아내고 내쫓는다.

영탁의 모습을 보니 현대 사회의 전체주의와 모습이 닮아있다고 느낀다. 미국이나 한국에서도 어떠한 이데올로기가 떠오르면 그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설은 현실에 맞게 생각을 수정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생각에 맞게 현실을 수정한다. 이를테면 부정선거와 관련해서도 말할 수 있겠다. 부정선거가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부정선거에 맞춰 현실을 수정하려고 한다. 온갖 유튜브가 난무하고 둘로 우리나라가 쪼개진 것은 이 부정선거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데올로기는 역사적인 측면에서 서로 닮아있다. 나치도 생각했다. 유대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논리를 말이다. 나치 정권에서는 유대인을 죽일 이유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유를 만들어 냈다. 이를테면 역사 속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 유대인의 핏줄은 열성의 유전자를 타고났다.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인류는 깊은 곳에 선을 향한 갈망이 있다. 그렇게 쉽게 선동되지 않는다고 나는 믿는다. 그럼 무엇이 그들을 선동되게 할까? 이 책의 저자는 그것을 두려움이라고 한다. 나치 정권에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었고, 이곳에는 누가 들어갈지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공포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에서는 생각까지도 우리는 지배받는다. 전체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개인의 생각마저 통제하려는 경향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보면 생각을 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유력을 헌납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정보의 과잉 속에서 우리는 공포 메시지를 쉽게 전파한다. 최근에는 혐중 시위가 서울에서 있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중국이 우리나라의 선거에 개입했고, 중국이 우리나라를 넘보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안보가 중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 안보가 근현대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정치에 활용되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혐오'가 확산된다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전체주의로 향하는 길목에는 늘 혐오가 마중 나와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홀로 있을 때 나는 가장 외롭지 않다고 말했다. 외롭다의 어원을 살펴보면 '외-'라는 접두사에 '-롭다'라는 형용사를 만들어주는 접미사가 붙어 형성되었다. '외골수', '외길' 등을 살펴보면 '외-'에는 홀로라는 뜻이 들어있다. 외로움이란 홀로 된 상태를 기본적으로 의미할 텐데, 왜 그녀는 홀로가 가장 외롭지 않다고 했던 걸까? 한나 아렌트의 시간은 홀로 있지 않았다. 책과 사색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대화로써의 상대가 늘 존재했다. 한나 아렌트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녀와 대화를 하는 마음으로 임한다고 한다. 한나 아렌트는 우리를 대화로 이끈다. 홀로 있더라도 그것은 정서적 홀로 됨이 아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어떤 측면에서 도덕적인 모습들도 있었다고 했다. 이를테면 책 '롤리타'를 권한 사람에게 이런 것도 책이냐며 비난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관료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관료적인 언어는 무엇일까? 이를테면 예외가 없는 언어라고 볼 수 있겠다. 법대로, 원칙대로 하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그렇게 수많은 이들을 죽이면서 자신의 기능을 수행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지점은 이런 것이지 않을까? 한 친구가 나에게 너는 이념적으로 쏠려있다고 말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나 또한 우리 사회의 특정 세력들을 그저 비판만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한나 아렌트는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 말한다. 언어가 정치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이다. 반면 언어적 교란은 정치를 나쁘게 만드는 수단이 될 수도 있겠다. '1984'에서 나오는 신어가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우리 사회에서도 수많은 언어들이 교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를테면 12.3 계엄은 계몽을 위한 것이라는 언어적 교란은 우리 사회를 두 쪽으로 쪼개어 버렸다. 우리는 수많은 언어적 교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말하는 '바퀴벌레'처럼 말이다. 언어적 꺼풀을 벗겨내고 우리로 만나 대화하는 날을 꿈꾼다. 전체주의가 아니라, 개개인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주의가 우리를 회복시키는 날이 오길 바란다.

#한나 아렌트와 차 한 잔 #김선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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