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화, 이한솔, 신새벽, 정기현, 김세영, '낮술, 낭독'
'스스로 길어 올려 속내를 드러낼 때에서야 교감이 생긴다. 나는 이를 서로에게 닿음이라고 생각한다(285p)'. 조하리의 창 이론에서는 인간관계에서의 핵심을 이야기한다. 나와 타인이 아는 영역을 조금씩 넓혀 나갈 때, 인간관계가 확장된다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것까지 상대방에게 알려줄 수 있는가에 대한, 스스로의 선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선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내 모습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선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아를 마주하는데 이는 아픈 일이다. 그렇기에 조금씩 서로 호의를 가지고, 알아채게 해주는 노력들이 필요하다. 작은 관계들이 쌓여서 나의 선이 되고, 선이 나의 모양이 된다.
나는 독서 모임을 좋아한다. 그 공간에서는 나의 이야기들이 충분히 쉬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점도 좋아한다. 서점은 서점 나름의 색깔이 있다. 나는 대전에 있는 서점을 주로 다니는데, 한 달에 한 번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제각기다. 동화책을 쓰시는 분도 있고,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시는 분도, 또 학생도 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서 책을 통해 이야기를 나눈다. 서점지기가 우선 질문을 던진다. '책 어떻게 읽으셨어요?'. 우리는 제각기 이야기를 꺼낸다. 이야기는 쉬어가야 한다. 이야기는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는다.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으면, 내면에 그대로 고인다. 고이면 스스로를 생채기 낸다. 캐스트 어웨이의 '윌슨'도 그렇게 탄생한 것이지 않겠나. 다만 안전하게 이야기가 쉬어갈 공간이 필요하다. 내 편이라고 생각되는 따스한 느낌. 나는 책이라는 연결고리로 엮일 때, 보금자리가 탄생한다고 생각한다.
책은 언어의 산실이다. 즉 언어를 보듬는 집과 같다. 그래서 책을 통해 우리의 이야기는 연결된다. 그래서 그런지 북클럽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거대한 집 속에 있는 식구들처럼 따듯하다. 차와 이야기와 작은 공간, 은근하게 흐르는 노랫소리. 하나하나가 모여 그날의 서사가 된다. 그 공간에서는 언어가 만나 공명한다. 이를테면 우리 사회에서 뜨개질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따위의 우리 삶과 직결된 사소하고 생동감 있는 이야기들이다. 이러한 개인적인 서사를 토해내다 보면, 질문이 조금씩 거대해진다. AI가 빼앗아 가면 안 되는 것은 무엇일까 따위의 것으로 말이다. 작은 질문에서 북클럽 친구들과 깊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2시간이 훌쩍 지나있다. 머릿속의 생각들은 정리되고 속이 후련해진다. 곪아있던 이야기들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다.
이 책은 민음사에서 함께 일하는 편집자들의 낮술 낭독회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책을 읽는 것인지, 그 사람의 삶을 읽는 것인지 헷갈린다. 이렇게 헷갈린다는 것은 우리가 언어에 기대어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금 알려준다. 아울러 그런 의미에서 책은 언어로 된 집이지만, 나아가 우리의 내면 속에 있는 언어를 길어 올리는 마중물이다. 언어로 언어를 길어 올리는 묘한 상호작용 속에서 우리는 서로가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걸 조금씩 자각한다. 가장 실천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방법은 책을 통해 사람을 만나는 것 같다. 책이란 정적인 행위처럼 보일 수 있지만, 가장 동적인 행위이다. 책을 읽는 동안 우리의 뇌가 활성화되는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첩보전에서 정보가 힘을 갖듯이, 보이지 않는 것들이 가장 거대한 에너지를 이끌어 낸다. 책은 매개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꺼내놓는다. 이때 고민하게 된다. 어느 정도까지 자신의 삶을 꺼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낮술 낭독은 이런 면에서 역치를 낮추어 놓는다. 술만 한 촉매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 한 친구에게 걱정을 들었다. '네가 다니는 독서 모임들을 보면,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이 없는 것 같아. 그러니 다양한 사람들을 더 만나면 좋겠다'라고 말이다. 뼈를 때리는 말이 아니라, 뼈를 부수는 말을 면전에서 하니 쓰라렸다. 북클럽에서는 비판하는 사람은 없다.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꺼내어 놓고, 받아들이면서 경청한다. 나는 '네가 내 곁에 있잖니. 그러니 나를 비판해 주는 사람을 잘 만들어 가고 있는 것 아닐까'. 너스레를 떨었다. 이야기를 할 때 어떤 비판이 필요할 수 있겠다만, 우리 삶은 모든 공간이 비판으로 들어차 있지 않을까 했다. 비판을 들이대며, 올바르게 나아가야 한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선 그 친구가 약간 걱정되기도 했다. 누군가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단단히 발 딛고 있는 사랑의 공간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청은 가장 비판적인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장치가 아닐까 한다. 북클럽의 경청은 나의 모습 한 구석을 채워주고 있는 '헤테로토피아'다. 그 공간에서 받은 사랑과 연대의 언어로, 모순된 나를 직시하며 느끼는 수치심과 맞설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다. 직시할수록 나는 모순적이기에, 그 모순 속에서 기댈 공간, 헤테로토피아인 북클럽에서 나는 오늘도 직시하는 용기를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