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삶으로 불편함이 닿는 순간, 더듬어볼 겨를 없이 움츠러드는 선의를 지닌 단순한 인간이었다
마음 맞는 선생님들과 독서 모임이 있었다. 안보윤 작가님의 '밤은 내가 가질게'를 읽고 우리 시대에 함께 살아간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설에서는 주승이라는 아이가 나오는데, 사회에서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이다. 그 아이는 심리적 어려움이 쌓여, 돌발적인 행동들을 보이는데 유치원 선생인 주인공이 이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런 주승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선생님으로서의 삶을 고민하게 되었다. 주인공과 주승이의 관계를 보곤 나는 그러한 모습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공의 후임인 나무반(소설 속 별칭)은 그렇게 해선 안 된다며 주승이를 돌보고자 마음을 먹는다. 그렇게 나무반은 주승이를 돌보는 듯하지만 얼마 못 가 주인공이 주승이를 끊어주니 고마워한다. 이런 모습을 보며 뭇사람들이 주위 사람을 돌볼 수 있는 인내심은 딱 나무반 선생님 정도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머리로만 불편함을 느끼는 삶을 살아왔다. 나는 삶으로 불편함이 닿는 순간, 더듬어볼 겨를 없이 움츠러드는 선의를 지닌단순한 인간이었다.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크게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다른 말로 무관심에 관대한 태도다. 우리 사회에는 주승이 같은 아이들이 많다. 어릴 적 애착관계가 잘못 형성된 아이들이 사회에 나와서 관계를 맺기란 어려운 일이다. 심리학자 허지원은 잘못된 애착 관계가 재배선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하나 이것은 사회적으로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여유가 주어질 때라 하겠는데, 우리 사회는 이미 많은 부분에서 그런 기회를 앗아가고 있다.
최근에 학생들의 문제를 경찰들에게 넘기는 경우가 많다고, 경찰들이 선생님들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기사문을 보았다. 나도 선생이지만, 경찰의 입장이 이해가 되었다. 학교에서 처리할 일을 왜 경찰서에 들고 오느냐가 그들의 주장이다. 지난 학교에서 학교 폭력을 전담하는 변호사가 와서 연수를 했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감정적인 다툼으로 보아야 하는 것들은 중재가 가능하다며, 그렇게 해결되는 경우들도 있다고 했다.그러나 감정이라는 말은 투박하다. 기쁨이란 얼마든 공감할 수 있지만, 슬픔과 분노, 두려움과 원망은 겹칠 수 없다. 손가락에 박힌 가시 같아서, 잘못 꺼내려 섣불리 덤비면 더 깊게 들어가 아리게 하는 것들이 이런 감정들이다. 그래서 투박한 제도들이 그 뒤를 따라오는 것이겠다.
사실 우리 사회의 주승이를 끊어내려면 눈 한번 딱 감으면 된다. 주인공처럼 앞으로 어린이집으로 오지 말라며 단호하게 끊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주승이 같은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나는 우리 사회의 돌봄의 단절이 결과인 것인지 과정인 것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주승이는 결과이면서 과정이지 않을까? 연대가 사라져서 주승이를 끊어내고, 주승이를 끊어내니 연대가 상실하는 것. 사람들을 믿지 못해 떠나보내고, 떠나가니 더욱 믿지 못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놓여있다.
최근 들어 어떻게 이 연대를 회복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꾸준히 글을 적으며 타인의 이야기도 들으려 애쓰고 있는데, 오늘은 '자람'님이라는 분의 글을 읽었다. '자람' 그 말뜻이 참 애틋하다. 자라기 위해서는 기다림이 필요한 것이니까, 말 자체에서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는 따듯한 시선이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오늘 일기에 언급해도 될까요?'라는 허락을 구하고 일기를 쓴다.
나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나무반과 큰 차이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결국은 쉽게 움츠러드는 선의를 펼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은 그렇게 암담하지 않다. 주인공 '나'는 소외받는 존재들을 결국 자신의 공간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끌어들이는 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결국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씨앗을 심고 안 큰다고 파내는 손가락은 조급함으로 말미암아 만남을 지나치게 한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과실이 계절의 빛깔 속에서 저절로 익어가듯, 기다리는 일이다. 누군가를 돌보고, 자라게 하는 것은 느린 마음이다. 반드시 오는 것에 대한 느린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