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어렵다. 특히 나에게 시작은 완벽한 계획이 필요했다. 콘셉트를 하나하나 만들어야만 시작할 수 있는 것이 글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목표에 따라 명확하고 완벽한 책 한 권을 내고 싶었다. 이를테면 독립 서점 도전기, 즐거운 수업 사례집, 고전 독서 문집. 시작하지 못했다. 포기는 중도에 그만두는 것이 아니었다. 포기는 지속하지 않을 이유로 높은 목표를 꾸역꾸역 갖다 대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 연재의 목표는 쓰기가 아니라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완벽한 글이 없음을 안다. 좋은 글과 좋지 않은 글도 없다. 다만 진실하거나 진실하지 않거나, 두 종류의 글이 있을 뿐이라는 믿음으로 꾸준히 써보고자 한다. 일상에서 할애하고 있는 시간이 내 정체성이다. 쓰기를 위해, 읽기를 위해 내가 비워둔 시간이 나를 설명하는 해시태그다.
‘짧은 우리네 인생에 긴 목표일랑 잘라내라/ 말하는 새에도 우리를 시새운 시간은 흘러갔다/ 내일은 믿지 말라/ 오늘을 살라(호라티우스)’
내일의 글이 아름다울 것이라는 착각을 내려놓는 것에서 글은 탄생한다. 한 신문을 읽다가 우연히 한 문학 작품에 대한 평론을 보았다. 그 평론가는 작가가 삶의 전반에서 일관성 있는 글을 썼다며 칭찬했다. 이 평론에 담긴 전제는 자신이 쓴 글들에서 일관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동의한다. 그러나 사람은 변화한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쓰는 사람도 늙는다.
우리가 늙어가면 언어도 함께 낡아간다. 의미도 조금씩 변한다. 초등학교 때 일기를 문득 읽은 적 있다. 그때 나는 낯설었다. 지금 열심히 적는 나의 글은 지금의 내 지식과 경험으로 솔직하게 쓴 글이다. 30대에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은 세월에 따라 낡아갈 것이다. 생각 또한 낯설어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먼 순간 지금 적고 있는 나의 글을 그날의 내가 파괴해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쓴다. 모순으로 나아가며 스스로의 헤게모니를 만들어 가야지. 통합은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모순의 예들을 무한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니까.
이 짧은 원고들을 ‘백(百)’이라는 제목 아래 엮으려는 이유는 내 삶이 문장으로 다듬어졌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를 일으킨 문장들에 하나씩 경험을 붙어보기 위해서다. 훗날에는 한 문장에도 세월에 따른 다른 경험들이 덧붙여지겠지.
대학생 때 체게바라 평전을 읽으며 혁명에 대한 선망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행동하는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행동하라’
아직 기억에 남아 내 삶에서 울림을 갖는 것을 보면, 내 삶은 울림 그 이상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각 개체들이 서로 울리면서 진폭이 커지기도, 소거되기도 하는 것.
내 울림을 만든 백 가지 문장을 내 경험으로 꼭꼭 씹어보고 싶어 백(百)으로 지었다. 잘 쓴 글보다 진실한 글을 쓰고 싶다. 쓰고 싶다고 생각하며 난 이미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