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김치
지난 명절에 시댁에서 새로운 집된장을 받아왔다. 동네할머니가 주신 거라며 어머니가 나눠먹자 하셨다. 집에 들고 와 유리병으로 옮겨담다가 손가락에 묻은 된장을 버릇처럼 입으로 가져갔다. 와 맛있다! 된장찌개 끓였을 때가 너무 궁금할 정도로 생된장이 맛있었다.
한동안 집에 먹을 것이 넘쳐났다. 추석명절 후이기도 했고 어머님댁에서 가져온 고기, 나물, 지인들에게 받은 채소들, 요즘 그렇게 귀하다는 송이버섯, 해동시켜놔 버린 반건조고등어, 어머님 생신이라고 곰솥에 한가득 끓여놓은 미역국 등등 급하게 처리해야 할 식재료들이 많아 된장찌개를 끓일 수가 없었다. 그런 것들을 다 먹어치웠을 즈음 또 외식할 일이 많았다. 연달아 3일 저녁을 돼지고기, 소고기, 돼지고기를 먹고 나서야 아, 그동안 너무 헤비 하게 먹은 것 같으니 오늘은 된장찌개를 끓이고 갖가지 나물해서 조금은 가볍게 먹어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유리병 한가득 담겨있는 귀한 된장과 이틀 전에 남편에게 사달라고 부탁하고서 외식하느라 못 먹은 손두부 한모, 양파와 대파, 버섯과 감자 그리고 곱게 갈아놓은 건새우와 멸치가루를 꺼냈다.
요즘 코인육수라고 갖가지 재료들을 동결건조시켜 작은 코인형태로 만들어져 나와서 간편하게 육수를 낼 수 있게 한 제품들이 많다. 이전에 유행한 육수팩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랄까. 그럼에도 나는 육수팩조차 써본 적 없이 일일이 멸치를 덖어 육수를 우려냈다. 사실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귀찮기도 하고 부피도 커서 냉동실에 자리차지도 많다. 그런 걸 느낄 때마다 그리고 대형마트에서 코인육수를 마주칠 적마다 한번 써볼까 싶은 마음에 집어 들었다가 조용히 내려놓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천연재료라고 하지만 뒷면을 보면 이런저런 엑기스분말이 가득 들어있다. 그거 좀 먹는다고 죽기야 하겠냐마는 ‘굳이’ 하는 마음이 더 클 뿐이다. 나 혼자만의 죄책감에 차라리 번거로움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집은 육수를 정말 많이 자주 낸다. 어쩌다 한 번씩 먹는 집이야 부피도 큰 멸치를 쌓아두고 먹는 것보다 간편하게 코인육수를 쓰는 게 맞을 것이다.
나는 그때그때 육수재료를 조절한다. 대단한 지식이나 철학이 있다기보다 그냥 나의 기분에 따라 내 마음대로 재료의 비율을 바꾸는 것이다. 가령 차돌박이된장찌개를 끓인다면 고기맛이 더 나기를 바라기에 향과 맛이 센 멸치나 디포리보다는 양파, 버섯, 대파뿌리 등으로 채수를 우려 쓰고, 샤부샤부를 먹을 때는 고기나 채소들을 데치면서 육수맛이 진해질 것이기에 가쓰오부시만 넣어 감칠맛만 낸다. 잔치국수를 먹을 때는 멸치 한주먹에 디포리 서너 마리와 다시마 그리고 건새우를 넣거나 따로 모아둔 코다리 대가리를 육수용으로 쓰기도 한다.
이렇다 보니 일괄된 비율로 들어있는 육수팩 같은 건 애초에 나에게 맞지도 않는 것이다. 이런저런 고집으로 인해서 편하게 살 수 있는 것을 포기한 것이기에 이제는 불편하다는 것도 모르겠고 불만도 없지만 가끔 정말 바쁘게 육수를 내야 하는 날은 또 코인 한 알이 간절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기억. 우리 엄마의 주방에는 가루가 담긴 통 네 개가 있었다. 멸치와 새우, 홍합과 표고버섯이 그것이다. 엄마는 잘 말린 그것들을 직접 분쇄기에 곱게 갈았다. 그리고 찌개에 국에 한 숟가락씩 퍼넣었다. 굳이 매번 육수를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가 그걸 왜 잊고 있었지? 냉동실에 넣어둔 육수용 멸치를 꺼내 내장을 손질했다. 그리고 미지근하게 열이 오른 웍에서 천천히 덖으며 수분을 날리자 비릿하던 냄새는 사라지고 바삭바삭 고소한 향이 날아왔다.
육수만 내고 버리기가 아까워 볶아만 먹던 질 좋은 보리새우도 미지근하게 바삭거릴 때까지 덖었다. 열기가 빠진 새우와 멸치는 분쇄기에 넣어 따로따로 갈아 유리병에 담았다. 한참 전부터 써오던 표고버섯가루까지 해서 나의 주방에도 이제 천연조미료 삼총사가 생겼다.
가루를 내어 쓰니 특히 좋은 점은 아낌없이 다 먹는다는 느낌에 있다. 항상 육수를 내고 재료들을 건져내어 버릴 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가루를 퍼넣으면 어차피 못 먹는 내장 빼고는 다 먹는 거니까 괜히 더 뿌듯하다. 그리고 새우가루 요게 또 요물인 게 새우깡맛이 나는데 어디든 일단 넣기만 하면 감칠맛이 제대로 올라온다. 육수뿐 아니라 나물을 무칠 때도 넣고 부침개를 구울 때 넣으면 그게 또 별미다. 아이들 반찬이 마땅찮아 주먹밥을 해줄 때 요 새우가루를 넣은 것과 안 넣은 것의 차이는 크다. 새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우리 아이들도 새우인지도 모르고서 맛있다며 잘 먹는다. 물론 처음에 재료를 손질하고 덖고 갈고 하는데 품이 들긴 하지만 한번 해놓으면 한동안은 잊고 있을 수 있으니 매번 육수 내는 것보다 훨씬 편하다. 코인육수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오늘은 기필코 보글보글 된장찌개를 끓여 새 된장의 맛을 보리라.
막내가 목욕탕에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 하원하자마자 데리고 다녀왔더니 이미 5시 반이었다. 1시간 뒤면 사과가 수영을 끝내고 오는 시간이라 바쁘게 움직였다. 운동을 한 날은 유독 배고파해서 빨리 준비해야 한다. 잡곡부터 물에 불려놓고 감자, 버섯, 양파, 대파를 손질했다. 된장을 한 숟갈 듬뿍 퍼서 물에 개고 멸치가루와 새우가루를 한 숟갈씩 넣었다. 보글보글보글. 희한하게도 자꾸 초코 냄새가 났다. 무슨 이런 된장이 다 있지?
음~ 맛있는 냄새.
초코 냄새나지 않아?
내 말을 못 들은 건지 남편은 대꾸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냄새를 맡으며 황홀해했다. 5시 50분. 압력솥에 쌀을 안치고 밑반찬들을 꺼냈다. 찌개에 넣으려고 손두부를 자르는데 찌개에만 넣기에는 양이 제법 많았다. 그렇다고 다시 넣어두자니 이미 이틀 전에 사둔 것이기도 했다. 고소한 두부를 한 조각 집어먹으면서,
오빠, 두부 양념장에 그냥 찍어 먹을래?
응 좋지~
그럼 김치 좀 볶을까? 두부김치?
오 좋다! 대패도 좀 넣어서.
오오 오늘같이 흐린 날 두부김치 좋지! 동동주도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얼른 웍을 달구고 냉동실에서 대패삼겹살을 꺼냈다. 달달달 고기부터 볶았다. 센 불에서 어느새 다 익은 고기는 매운 걸 못 먹는 심쿵이를 위해 한 접시만 꺼내두고 맛술과 오미자청 한 숟가락씩 넣고 잘라놓은 묵은지를 쏟아부었다. 다른 채소들을 손질할 새도 없고 굳이 필요도 없었다. 자글자글 고소한 돼지기름과 갖은양념의 묵은지가 알아서 먹음직스럽게 볶일 것이었다. 내가 할 일은 타지 않게 뒤적여주는 것뿐.
마침내 김치가 야들야들하게 볶아졌을 때 불을 끄고 들기름을 둘렀다. 두부는 따뜻하게 데워 먹기좋게 잘랐다. 그새 압력밥솥의 추가 팽팽 돌고 있었고 구수한 밥냄새가 났다. 두부까지 넣고 푹 끓인 된장찌개를 작은 뚝배기에 덜어 내고 두부김치도 한 접시에 소담하게 담았다. 며칠 전 만들어둔 양념간장도 종지에 덜어내고 밑반찬들도 작은 접시에 조금씩 담아 음식들을 식탁으로 옮기다가 갑자기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참내. 가볍게 된장찌개는 무슨. 결국 또 고기반찬이네. 우리는 안 되겠네 안 되겠어.
때마침 수영을 마친 아이에게 출발한다는 전화가 왔다. 날이 어두워져 남편이 아이를 데리러 나간 사이 수저를 놓고 압력밥솥 뚜껑을 열었다. 누룽지 냄새가 살짝 났다. 전기밥솥에서 밥을 지을 때는 절대 못 먹었던 누룽지는 밥을 할 때마다 살짝만 눌려 일부러 만든다. 누룽지만 빼고 위아래 잘 섞어 각자 양만큼 퍼담았다. 그리고 누룽지는 밥 위에 덮어준다. 노릇한 누룽지가 보이면 아이들은 더 잘 먹는다.
윽 이게 무슨 냄새야? 꾸릿꾸릿한 냄새가 나!
언제 들어온 건지 사과는 들어오자마자 코를 막았다.
청국장 같은데? 맛있겠다!
뒤따라 들어온 남편이 나 대신 대답을 했다.
이게 청국장 냄새라고? 아까부터 나는 초콜릿을 녹이는 냄새가 왜 자꾸 나나 했는데 아이의 반응에 실없이 웃음이 났다. 그래서 그런가 아이들은 된장찌개를 별로 먹지 않았다. 차려놓은 식탁을 보아도 무의식적으로 가장 큰 접시에 담은 두부김치를 식탁 한가운데에 놓여있었다. 주객이 전도되었다. 남은 두부를 먹어 없애려고 김치를 볶았는데, 벼르고 벼르던 된장찌개를 드디어 했는데, 다들 두부김치만 맛있다, 맛있다 하며 먹어댔다.
마침내 우리가 수저를 모두 식탁에 내려놓았을 때 두부김치는 있었는데 없어졌고 식어빠진 된장 뚝배기는 여전히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