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이면 좋아할 것

by 달콤한복이


이사준비를 하느라 묵은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작은 물건 하나에도 추억이 깃들지 않은 것이 없었기에 그전의 나였다면 절대 버리지 못했을 물건들이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웬만한 것은 이사 전에 다 비우고 가려고 마음먹었었다. 남들에게는 의미도 없는 것들인데 추억에 연연해서 더 이상 끼고 살지 말자고. 추억은 추억일 뿐이라고.

바쁘게, 그리고 미련 따위 없이 시원시원하게 짐을 정리하는 내 모습이 멋져 보였다. 막상 비우고 보니 미련도 같이 떨어져 나갔다. 그래 별것도 아니었는데 괜히 이사 다닐 때마다 들고 다녔네 무겁게.

그렇게 신나게 정리하던 중이었다. 작업실로쓰던 방에서 무거운 은색 보냉파우치가 나왔다. 제법 묵직했다. 짐정리를 하다 말고 파우치를 열었다. 다름 아닌 카세트테이프였다. 학창 시절에 한창 좋아했던 가수들의 음반도 있었고 이름 없는 공테이프들도 있었다. 거기에는 라디오에서 나온 음악이나 내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으리라. 곧 그것들을 다시 보냉파우치에 차곡차곡 정리해서 넣었다. 이것만큼은 꼭 한번 들어본 후에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부로 버릴 수가 없었다. 이사를 하던 날 짐을 정리하면서 내 물건만 모아둔 선반장 한편에 올려두었다. 은색보냉파우치 째 그대로.


어릴 때부터 노래 부르는 걸 워낙 좋아했다. 이건 아빠를 닮았다. 우리 아빠는 술을 마시거나 안 마시거나 흥이 나면 손으로 밥상을 두드리며 셀프장단에 맞춰 맛깔나고 간드러지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었다. 멀쩡히 얘기하다가도 갑자기 노래를 부르는 아빠는 어릴 때 우리 동네 아저씨들 사이에선 나훈아로 통했다. 나는 밥상까지 두드리지는 않지만 흥이 많은 편이다. 비록 수줍음도 비슷하게 많아 아무 자리에서나 흥을 표출하진 못한다. 때와 장소를 가린다.

어릴 땐 거울을 보며 노래를 불렀다. 작은방 벽에 동그랗고 커다란 거울이 걸려있었다. 그 거울 앞이 나의 무대였다. 주말마다 창작동요제 같은 프로그램을 보며 언젠가 나도 저기 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노래를 불렀다. 거기 나오는 친구들처럼 두 손은 배꼽 앞에서 예쁘게 맞잡고 고개는 좌우로 리듬을 타면서 거울 속에 노래하는 나에게 꽤 집중했다. 뒤에서 언니들이 한심하다는 듯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창작동요제에 나가려면 노래 연습을 좀 해야겠는데, 보는 눈이 많으니 마음껏 부르지를 못했다. 그래서 동요제는 자연스럽게 포기가 되었다.

초등학교 때 큰맘 먹고 학교 합창단에 지원을 했다. 피아노 반주도 있고 지휘하시는 선생님도 있고,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목청껏 소리 높여 마음껏 노래를 부를 수도 있어 너무 행복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1년을 못 가 합창단이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참 알 수 없는 인생이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공테이프에다가 녹음을 하며 노래를 불렀다. 녹음한 노래는 혼자 이어폰을 끼고 집중해서 들었다.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듣는 건 낯설면서도 좋았다. 라디오를 달고 살던 언니덕에 집에는 공테이프가 많았다. 언니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들을 곧잘 녹음했는데 보고 배우는 게 컸다. 사연소개가 끝나서 노래가 나올 타이밍이면 손가락은 녹음버튼 위에서 대기했다. 무슨 노래가 나올지 모르기에 일단 버튼을 누르고 봤다. 마음에 들지 않는 노래는 그 위에 다른 노래를 덮어 녹음하면 그뿐이었다. 녹음해 둔 노래는 재생버튼-일시정지버튼을 무한 반복해 가며 가사를 받아 적었다. 그렇게 훈련이 되어서 나중에는 랩까지 받아 적는 능력을 발휘했다.

가사를 보며 불도 켜지 않은 어둑한 방 안에서 도둑 녹음을 했다. 누가 알까 창피한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어디에나 복병은 있으니, 내 동생이 문제였다. 거의 나와 함께 다니다 보니 얘를 떼어놓을 방법이 없었다. 나가라고 해도 나가지 않고 오히려 더 궁금해서 달라붙는 통에 골머리가 아팠다. 차라리 함께 노래를 하자. 그룹의 노래는 혼자 다 부를 수가 없어서 시도조차 못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잘된 게 아닌가. 동생에게 파트를 나눠주고 노래를 알려줬다. 박자가 틀리면 어김없이 녹음을 중단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켰다. 성인이 된 어느 날 내 동생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한마디 했다. "대~단한 음반제작자 납셨다!!"

큰언니가 취직을 하면서 우리 자매들끼리 종종 노래방을 갔다. 세상에 이런 천국이 있다니! 노래를 부르면 테이프에 녹음도 해서 주셨다. 내가 어른이 되면 매일 이곳으로 출근하리라 마음먹었다. 중학교 때 우리 집 근처에는 작은 오락실이 있었다. 시끄러운 오락실안에 동전노래방 두 칸이 새로 들어섰다. 저녁을 먹고 꽉 찬 동전지갑을 챙겨 사촌동생과 만났다. 우리는 각자 딱 세곡씩만 부르고 집으로 돌아왔다. 진짜 내가 어른이 되어 돈을 벌게 된다면 노래방에서 살리라!

그날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노래방메이트를 만난 거다. 주머니사정이 딱했던 고등학생시절을 지나 우리가 성인이 되었을 때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것을 이루게 된다. 쓸데없이 하고 싶은 게 많은 두 소녀는 '위시클럽'을 결성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아예 날을 잡았다. 온전히 노래방이 목적인 날이었다. 날이 잡히면 그날 부르고 싶은 노래를 계속 들으며 연습했다. 목소리가 제일 잘 나오는 늦은 오후에 만나고 너무 배가 부르면 숨차서 노래를 못하니 저녁은 간단히 샌드위치나 분식으로 때웠다. 입가심으로 목캔디를 하나 사서 먹으면서 입장한다. 우리는 그날의 가수를 정하기도 했는데 그건 기분에 따라 날씨에 따라 정해진다. 파트를 나눠 부르기도 하고 방방 뛰어가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기도 했다.

혼자였거나 누구와 함께였거나 노래방을 나올 때 단 한 번도 기분이 좋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삑사리로 1시간을 다 채웠대도 늘 후련하고 웃음이 났다. 그래서 그렇게 노래방을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몇 년 전에 우리 아파트 앞에도 코인노래방이 생겼다. 거기 간판달 때 무인이라 신난다고 남편을 붙잡고 방방 뛰었던 기억이 난다. 남편도 노래방을 좋아하는데 아이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처음 노래방을 갔던 날 아이들은 너무 시끄러워서 다시는 가지 않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사람일이 어디 그렇게 되던가. 이후로도 두어 번 정도 더(사정사정을 해서) 데리고 가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아이들은 계절에 상관없이 털귀마개를 챙겼다. 그리고 구석에 둘이 딱 붙어 앉아 엄마 아빠가 절규하듯 소리치고 먼지를 털듯 몸을 흔들어 재끼는 모습을 무표정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신나는 음악에도 전혀 동요되지 않고 한여름에도 털귀마개를 하고 앉아 있는 아이들을 보고 그 이후로 우리 가족은 노래방에 발길을 끊었다.

한 2년 만인 거 같다. 이번 추석명절에 친정식구들이 다 모였을 때였다. 노래방 이야기가 나오고부터 9명이 집을 나서기까지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앞서 말했다시피 우리 아빠가 흥이 많았다. 그 피를 우리 다섯 자매들은 다 물려받았고 우리 조카들도 물론이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망설이는 사람이 없었다. 조카들과 뒤섞여 아주 뜨겁고 대단한 시간을 보냈다. 얼떨결에 따라나선 우리 아이들도 웬일인지 재미있어했다. 물론 동요 한두 곡을 부른 게 전부였지만 싫다고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또 가고 싶다는 말을 종종 했다.

이른 저녁을 먹은 어느 날 우리 가족은 다시 노래방을 찾았다. 이번에는 아이들이 단단히 벼론 것 같았다.

엄마, 케데헌 골든 먼저 넣어줘. 소다팝도 넣어야 해!

요즘 인기 있는 케이팝부터 동요까지 줄줄이 요청곡이 많았다. 그 덕에 남편과 내가 부른 건 두곡이 전부였다. 이른 시간이라 손님은 우리뿐이었고 밖에까지 울려 퍼진 아이들의 목소리가 사장님의 마음을 움직인 건지 계속 시간을 추가해 주셨다. 아는 동요는 노래방에 없는 곡이 많아 불렀던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며 2시간을 꼬박 채웠을 때 또 30분을 추가해 주셨다. 이미 9시가 다 되어갔고 목요일이라 주말에 다시 오기로 약속을 하고 나서야 노래방을 나왔다. 부랴부랴 씻기고 잘 준비를 하다가 피식 웃음이 터졌다.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이 빤히 쳐다봤다.

아니, 너희가 노래방 싫다고 입 툭 튀어나왔을 때, 엄마가 참 이상하다 했지... 근데 오늘 마이크 안 놓는 거 보니 마음 놓이네. 그럼 그렇지! 내 딸이 그럴 리가 없지!!
큭큭 진짜 이상해 엄마. 그때는 왜 그렇게 싫었을까? 이제는 소리가 시끄럽게 느껴지지도 않아. 소리가 크니까 오히려 더 재밌는데? 히히 우리 또 가기로 약속했지?

그날 이후로 아이들은 노래연습을 한다. 마이크를 통해 울린 본인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자신감이 붙었다. 동요대회도 나가보고 싶다 하고 나중에 가수를 할지 말지 고민 중이라는 말도 한다. 각자 따로 부르는 통에 귀가 터질 지경이지만 오히려 좋다. 한국인이라면 무릇 감정을 노래로 풀어내는 감성이 깊숙한 어딘가에 있기 마련이지.

나는 우리 아이들이 싫어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 안 하는 것보다 일단 해보기라도 하게 되길 바란다. 거창한 준비물 필요 없이 내 목소리만 있으면 언제든 즐거운 게 노래이지 않은가. 잘 부르고 못 부르고를 떠나 즐길 수 있는 게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니까. 한때는 꿈이었고 이제는 설거지를 할 때나 콩나물 대가리를 뗄 때도 늘 흥얼거리는 나에게, 그리고 돌아가시던 마지막 날 밤까지도 병원이 떠나가라 노래를 불렀던 우리 아빠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라라랜드가 되어주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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