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손톱

by 달콤한복이


다크초콜릿같이 어두운데 빛비치면 버건디 같은 그런 색도 있나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네일숍을 갔다. 결혼 전에 가족들과 제주도 여행 간다고 동생과 네일을 받아보고는 처음이었다. 그때는 젤네일도 아닌 매니큐어 시절이었다. 가끔 붙이는 네일스티커나 손톱보호기능을 하는 매니큐어를 직접 바르긴 했어도 샵에 가서 케어를 받는 건 거의 20년 만이라 아는 동생 가는 길에 나도 따라갔다.

고작 네일 그게 뭐라고 전날부터 설레는 마음에 네일만 검색하고 또 검색했다. 요즘 유행하는 자석젤도 예쁘고 투명한 시럽젤도 예쁘고 반짝반짝 겨울에 어울리는 뽀얀 네일도 모두 신세계였다. 어떤 걸로 할까. 뭐가 어울릴지도 모르겠고 처음이라 욕심이 났던 건지 아무튼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그래도 크지 않은 손에 손가락도 가늘고 나름 귀여운 손이었는데 아이 셋 키우며 관리도 안 했더니 주름도 자글자글한 데다 손가락마디는 언제 또 이렇게 굵어진 건지 애꿎은 핸드크림만 바르고 또 바르며 집을 나섰다.

생각해 놓은 디자인이 있냐는 말에 그냥 무난한 거... 하다가 갑자기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 버건디였다.

네일숍 원장님은 버건디 계열의 여러 가지 색을 꺼내 손가락 끝에 찍어 발라주셨다. 너무 빨개서 눈에 띄지 않는 색감이 나을 것 같아 다크초콜릿이라고 했는데 막상 손가락에 발린걸 보니 맑은 빨강이 맘에 쏙 들었다.


요고요! 요 색깔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보통 처음에는 티 안 나고 무난한 것부터 하시는데 처음 하는 거 치고 화려한 거 하시네요!
이런 색깔 꼭 한 번은 해보고 싶었어요
하고 싶은 건 해봐야죠! 그럼 이 색으로 할게요



사람의 이미지는 무엇으로 정해지는 걸까.

외모, 옷차림, 말투, 행동, 그 사람의 신념, 살아온 환경과 주변의 인간관계까지도 아예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

20대 초 어느 날엔가 어떤 팬시샵 같은데에서 '봉숭아물들이기'라고 적힌 작은 튜브를 샀다.

진짜 꽃물은 아니고 인공색소로 만든 것 같았는데 손톱 위에 칠해놓으면 진짜 봉숭아처럼 물이 들었다. 그런데 한 번 한 것은 조금 촌스러운 색깔이라 여러 번 계속 올려 물을 들였더니 핏빛 같은 새빨간 색이 나왔다. 진하고 강하고 어른 같은 느낌의 그런, 그런데 또 예쁘긴 엄청 예쁜 색의 빨강.

양손의 약지와 새끼손가락에만 물을 들였었는데 처음 해보는 진한 색이 조금 부담스럽긴 했어도 손도 하얘 보이는 것 같고 예뻐서 꽤 맘에 들었다.

평소처럼 출근을 했는데 회사에 나이가 좀 있으신 분이 내 손을 보고는 "한테 어울리지 않게 그런 야한 색을 손톱에 칠했냐"며 깜짝 놀라셨다. 내 옆에 있던 다른 언니를 보고 그런 색은 그 언니에게나 어울리는 색이지 하시면서.

그나마 매니큐어가 아니라 봉숭아물을 진하게 들인 거라고 했더니 그건 또 수긍하셨다.

나와 옆에 있던 언니 둘 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는 되고 너는 왜 안되냐며, 겨우 손톱일 뿐인데 색에 그런 게 어딨냐고 말하는 언니는 나보다 기분이 언짢아 보였다.

그리고 나는, 너무 창피했다. 부끄러웠다. 마치 하면 안 되는 것을 하고 들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날 하루 종일 손가락을 펼 수가 없었다. 매니큐어가 아니라서 이건 지울 수도 없었다. 얼른 손톱이 길기만 바랄 뿐이었다.

나 스스로도 나에게는 진한 빨강보다는 파스텔톤이 더 어울린다고 늘 생각해 왔다. 흔히들 말하는 이미지라는 것 말이다. 수수하고 무난한 것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나는.

그 후로는 손톱에 빨간색을 칠해본 적이 없다. 너무 예쁜 색임에는 틀림없는데 내 손톱이나 입술 위에 얹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이건 애티튜드도 한몫할 것이다. 내가 손가락을 쫙 펴고 당당하게 다닌다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스스로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부담스러우니 더 그렇게 보일 수밖에.


그랬던 내가 40대 중반이 되어 처음 하는 네일이 빨간색이라니. 또 누군가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지는 모르지만 한 번은 꼭 해보고 싶었던 빨간 손톱.

케어가 끝나고 핏기 없던 내 손톱에 붉은 혈색이 돌았다. 손끝만 바뀌었을 뿐인데 손이 달라 보였다. 통통하고 동글동글한 젤리가 붙어있는 것 같아 자꾸 눈길이 갔다.

집에 돌아와 제일 먼저 내 손톱을 본 사람은 7살 심쿵이었다.

빨간색으로 했어? 엄마 이런 색 하는 거 처음 봤어. 이런 색은 우리 할머니한테 더 어울리긴 하지만 엄마한테도 너무 예뻐.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사과는,

엄마. 진짜 귀여워! 나도 어른되면 이거랑 똑같이 하고 싶어!

늘 그렇듯 엄마의 모든 것을 다 따라 하고 싶어 하는 10살 딸내미답게 예측 가능한 반응이었다. 평소에 빨간색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엄마 손톱을 빨강으로 색칠하자마자 빨간색이 좋아진 아이다.

퇴근을 하고 집으로 들어오는 남편의 얼굴 앞에 인사대신 두 손을 쫙 펼쳤다.

짠!!
오! 예쁘네! 확실히 돈 주고 한 게 다르긴 하네.
안 어울리진 않아?
아니 괜찮은데? 예쁘다!

등하원길에 만나는 사람들도 바뀐 내 손톱에 눈길을 주었다. 나를 잘 아는 사람임에도 모두 예쁘다, 연말분위기 난다고 해주었다. 빈말이라도 예쁘다는 말들에 안심이 됐다. 큰맘 먹고 했는데 안 어울린다 어쩐다 할까 봐 신경을 쓰고 있었나 보다.

주말에 어머니가 김치를 주신다고 잠깐 다녀가셨다. 할머니한테 더 어울리는 색이라던 심쿵이의 말을 전했더니 그러셨다.

니도 이런 색도 한번 해보긴 해봐야지!
예쁘게 잘했네!



'이런 사람', '그런 사람'으로 단정 지어지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나쁜 뜻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나조차도 남을 볼 때 옷차림이나 외적인 모습을 살피게 되고 그동안의 나의 데이터들을 조합해 그 사람이 어떨 것이다 예측한 적도 있었다. 이 얼마나 가볍고 성급한 평가인가. 상대에 대한 존중이 부족한 것이지 않았을까. 사람은 누구나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 타인의 변화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하고 편견을 없애야만 진짜 그 사람을 알게 될 것이다.

한 달 전에 아파트 독서모임에 가입을 했다. 가입 후 첫 모임이 있었다. 네일을 하고 일주일 뒤에. 연세가 지긋하신 분부터 만삭의 젊은 엄마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그중 네일을 한 사람은 나 혼자였다. 문득 궁금했다.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은 빨간 네일을 한 나의 첫인상이 어떻게 기억될까. 겨우 손끝에 불과한 강렬함이 나라는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될까 하고.

요즘은 진주에 보석에, 키링으로 달법한 폼폼이도 손톱에 달랑달랑 거는 세상인데 빨간색쯤이야. 그래도 세상이 바뀐 덕에 내가 빨간 손톱도 다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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