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믿음의 반대말

by 달콤한복이


제법 해가 뜨겁던 7월. 우리는 사무실에 직원을 한 명 고용하기로 했다.

구인광고를 내자마자 많은 문의 전화를 받았지만 이것저것 물어만 볼 뿐 이력서를 보내온 사람은 2명뿐이었다.

한 명은 유치원 원장까지 했던 분으로 이력서 두 장이 화려한 경력으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또 한 분은 경력이 단절된 지 꽤 되긴 했지만 수년 전까지의 경리업무경력만 해도 16년인 그야말로 베테랑이셨다.

그중 누구라도 괜찮을 것도 같았지만 딱 한 가지 맘에 걸리는 건 모두 나보다 나이가 10살 이상 많다는 것이었다. 나이가 많은 게 문제가 아니라 나보다 한참 어른인 사람에게 일을 시키는 게 성격상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서 고민이 되었다.

요즘 일자리가 없다는 말도 많지만 사실 젊은 사람을 고용하는 게 더 힘들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에 나보다 어린 사람은 바라지도 않고 내 또래 거나 한 두 살 정도 위였다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에 하루 이틀 더 고민해보기로 했다. 이틀이 더 지나고 이제는 결정을 해야 했다. 그래도 다른 쪽 경력보다는 경력이 단절되긴 했어도 베테랑인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때 걸려온 전화를 받지 못했더라면 나는 그분께 바로 전화를 드렸을 것이다.



| 구인광고 보고 전화드렸는데요, 혹시 근무시간 조정이 가능할까요?


전화기 너머로 조금은 조심스러운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의 하원 시간 때문에 퇴근시간을 4시로 앞당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조금 난감하기도 했지만 희한하게 당돌해 보이는 그 물음에 끌리기도 했다.


스물여덟의 S는 4살 난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일이 너무 하고 싶은데 남편이 무조건 가족이 우선인 사람이라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면서까지 엄마가 일을 하는 건 반대하기에 혹시 모르니 물어나 보자 싶어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며칠 뒤 면접으로 직접 만나 본 S는 수수한 외모에 밝고 상냥하고 예의 바르고 그리고 당차 보였다.

첫 만남에 마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대화가 잘 이어졌다. 10년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키워서인지 우리는 제법 잘 통하는 듯했고 서로 비슷한 점이 많다고 느껴질 만큼 닮은 것도 같았다. 그래서인지 더 끌렸고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조금 성급한 것도 같았지만 딱히 더 나은 대안도 없었다. 그렇게 S는 8월 둘째 주부터 내 앞자리로 출근하기로 했다.

S가 출근할 날만 하루하루 기다려졌다. 늘 혼자 앉아 있던 넓은 사무실에 이제는 대화할 수 있는 상대가 생겼다는 것이 그렇게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새로운 사람이 앉아 있는 사무실 풍경은 사뭇 낯설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출근을 해서 나보다 앞서 주차되어 있는 차 옆에 나란히 내 차를 멈춰 세웠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고소한 커피 향이 풍기고 내 신발밖에 없던 신발장에 새로운 신발이 한 켤레 놓여 있다. 실내화로 갈아 신고 계단을 올라 2층 사무실에 들어서면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기는 누군가가 있다. 그게 나는 좋았다.

처음 해보는 업무에 혹시나 지치진 않을까 당장 급한 일부터 조금씩 가르쳤다. 대부분의 시간은 아이들 이야기를 하며 보냈다. 나이도 육아도 본인보다 한참 선배인 나에게 S는 종종 육아 상담을 해왔다.

비슷한 또래를 키우면서 서로 공감도 하고 아이를 낳고 한참 힘들었을 적 이야기를 하며 서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내가 겪었던 길을 지나고 있는 그 애에게서 지난 나의 모습도 겹쳐지며 진심으로 위로와 응원을 보냈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 혼자 앉아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퇴근하던 나에게 어느 날 내 앞자리로 출근한 S는 그리운 내 동생들의 빈자리를 대신해주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내 동생들과 그랬듯 웃고 떠들며 즐겁게 일을 했다.

그 아이를 잠깐 본 지인은 10년 전 그때의 나와 비슷하다는 말을 할 만큼 내가 생각해도 우리가 어딘가 닮은 것 같았고 그런 느낌 때문이었을까. 신기하리만큼 그 애가 금방 편해졌고 마음이 갔다. 그리고 잘 웃는 그 애가 참 좋았다.

나를 보며 늘 상냥했기에 그리고 늘 좋다고 말을 했기에 당연히 그 애도 정말 그런 줄로만 알았다.


S가 입사한 지 한 달이 좀 되었을 무렵부터인가 그 아이의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졌다.

상냥한 얼굴에 순간적으로 짧게 비치는 낯선 표정이 내 눈에 읽히기 시작했다. 마치 전과 같은 사람이 아닌 듯 뭔가 달랐다. 무례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그 수위가 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했기에 딱히 뭐라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조금씩 편해지는 건가 보다 하고 안일하게 생각을 했다.


분명 사람을 고용했는데 오히려 자잘한 일이 더 늘어난 것 같은 건 왜 일까. 무능함을 인정이라도 하듯 자기가 해야 할 일은 다 나에게 미루고 정작 본인은 할 일이 너무 없어 눈치가 보이고 그래서 힘들다고 했다.

내 앞에서 아주 순진한 사람의 어투로 사장인 내 남편과 다른 직원의 험담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나의 말을 다르게 전달해서 난처하게 했다.

때로는 나를 위해주고 걱정하는 것처럼 아주 예의 바르고 차분하게 말도 안 되는 조언을 했고 사람들이 흔하게 겪지 않는, 일반적이지 않은 자신의 경험담을 근거로 나를 '그런 사람' 혹은 '그렇게 될 사람'으로 만들었다.

온갖 거짓말과 거짓 웃음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동안에도 나는 끝까지 그 애를 믿었고 존중했다. 어이없게도.

그 애가 가지고 간 법인카드를 그 애의 남편에게 전해 받으며 듣게 된 사실이지만 그 애가 말한 퇴사의 이유가 어린 자신을 질투해서 괴롭히는 나 때문이라는 것에 또 한 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아이의 모든 가면이 벗겨지던 날을 잊지 못한다.

내가 알고 있던 모습과는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그날의 S는 나에게 충격일 만큼 낯설었다. 이전의 상냥하고 다정했던 눈은 어디 가고 날카로운 잿빛의 눈동자만이 바닥을 향해 있었다.

앞모습과 뒷모습이 상상을 초월할만큼 다른 것도,

그동안 나에게 보여주었던 모든 것들이 진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무엇보다 나의 멍청함이 그 애의 교활함에 놀아났다는 사실이 나를 아프게 했다.

진심으로, 온 마음으로 대해 주었던 나를 기만했다는 생각에 너무 괴로웠다.

더 늦지 않게 모든 걸 알게 된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그 애를 좋아했던 만큼 상처가 너무 깊었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은 관계를 지속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리라.

급하게 맘을 줘버린 외로운 나는 또 그렇게 믿었던 사람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가슴에 멍이 들었다.

가슴에 멍이 들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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