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었던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어떠한 명약으로도 아물게 하지 못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나에게 그대가 소중했던 만큼 너에게 나도 그러길 바랬을 뿐. 나의 주제넘은 욕심이 서슬 퍼런 날을 만들었고 나를 향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나의 조건 없는 선의가 크고 작은 배신으로 되돌아와 마치 철없는 나를 탓하기라도 하는 양 아프게 찔렀다.
잊고 지냈던 과거의 상처들과 그렇게 만들었던 사람들까지 모두 떠올라 정신을 차릴 수 없도록 한꺼번에 휘몰아쳤다.
내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너도 변하지 않았을까.
내가 마음을 주지 않았다면 배신감이 덜했을까.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누구로부터 시작된 건지 따질 여력도 없었다. 어디에도 털어놓을 곳이 없었다. 행여 있다고 하더라도 나조차도 이해되지 않는 이 상황을 설명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막막하고 답답했다.
한 점의 빛도 없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 혼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는 목소리도, 내 손을 잡아주는 온기도 없었다.
너무 무서웠다.
무서움에 부들부들 떨다가 이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갖은 애를 쓰며 떠올린, 독을 가득 품고서 거칠게 뱉어버린 날숨에는 나를 아프게 했던 만큼 너도 아팠으면 하고.
독하게 마음먹고 똑같이 해주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컸다. 하지만 그게 결국 나를 위하는 길이 아니란 걸 잘 알기에 더 괴롭고 아팠다. 결국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내가 살아야 했고 내가 괜찮아야 아이들을 지킬 수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평안할 수 있었다.
그래서 견뎠다. 상처는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거라고 믿었다.
단 한 가지. 내가 보잘것없고 하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게 견딜 수 없었다. 그런 존재로 살아갈 바에는 차라리 이쯤에서 세상과 작별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멀리 떠나고 싶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훌쩍 날아가고 싶다.
날아갈 수만 있다면.
누가 좀 나를 멀리 날려주었으면,
내 두 발은 차마 그럴 용기가 없는 것 같으니.
나를 괴롭히는 못된 생각들을 정리해야 했다.
나답지 않은 미친 생각들을 억지로라도 끝내야 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스스로를 믿지 못할 만큼 나는 약해져 있었고 두 발은 매일 땅 밑으로 조금씩 꺼져갔다.
죄 없는 내 가슴팍만 치고 또 쳤다.
두렵고 불안했다.
내가 이대로 망가지고 말까 봐 두려웠다.
내 손으로 아이들을 망치게 될까 봐 불안했다.
길을 걷다가 끝이 없는 구덩이에 빠진 기분이었다. 발은 닿지 않고 그 안에서 점점 가속도가 붙어가며 아래로 아래로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언젠가 끝을 만나 멈추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된다면 나는 산산조각 나 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아팠지만 아프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다 싫다. 내가 제일 싫고 밉다.
내가 왜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지난 나의 인생이 조각조각 스쳐 지나갔다.
단 한 번도 만만했던 적이 없었던 시간들이었지만 나름 잘 살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되돌려 다시 산다고 해도 그보다 더 잘 해낼 자신이 없을 만큼 충분히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신했던 나였다. 그런데 그런 내가 없어졌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이제 와서 돌아보니 내 인생에는 내가 없었다. 그동안 나는 누굴 위해 살아왔던 걸까...
아이들의 엄마는 있었지만 나는 없었다.
남편의 집사람은 있었지만 나는 없었다.
셋째 딸은 있었지만 나는 없었다.
내 인생인데 정작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도 쉬웠나 보다.
상처를 주어도 괜찮았나 보다.
어차피 비어있는 자리라서 아픈 게 티가 나지 않았나 보다.
잘 지내는 줄로만 알았다. 대체 언제부터 거기에 없었던 거냐고 묻고 싶어도 답해줄 내가 거기 없어서 묻지도 못하겠다.
나를 찾아오고 싶다. 내가 보고 싶다.
대단한 내가 아니어도 괜찮으니 다시 와주기만 한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