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 종일 전화가 그래 안되노?
| 몸이 안 좋아서 계속 잤다. 내일 갈게, 아빠.
| 몸이 와? 아프면 안 와도 된다. 단디 해라.
며칠 째 멍한 아침이 계속되었다. 몸이 휘청할 만큼의 어지럼증은 더 이상 없었지만 괜찮지도 그렇다고 안 괜찮지도 않은 날들이었다. 눈을 돌릴 때마다 뱅글뱅글 도는 느낌이었고 머리가 도무지 개운해지지가 않았다.
그래도 이제는 운전을 해도 괜찮을 것 같던 날에 아빠에게 갔다. 약속한 지 4일이나 지난 뒤였다.
요즘은 반찬 뭐해서 드시냐는 물음에 밥 정 없어서 아무것도 안 넘어간다며 다 버려야 되니 뭐 해오지 말라했다. 그나마 지난번에 가져온 설렁탕 국물은 후루룩 마셨는데 그거는 넘어갈라나 하는 말에 소머리 곰탕을 포장해서 간 길이었다.
아빠는 늘 밥 정 없다 한다.
어느새 내일모레 팔순을 앞두고 있어 예전 같지 않은 건 알지만 몇 년 전 위암으로 위 절제 수술을 하고 난 뒤론 뭔가를 맛있게 먹는 걸 통 본 적이 없다.
입맛이 없어 아침도 안 먹었다길래 지금 바로 곰국 데워서 한술 뜨는 게 좋겠다고 냄비를 꺼내는 내 팔을 기어코 막아선다.
| 내가 있을 때 먹으면 따로 안 챙겨도 되고 편하지, 설거지도 좀 해놓고 가고.
겨우 한마디 했을 뿐인데 아빠는, 좀 있다가 배고프면 내가 알아서 데워 먹으면 된다고, 먹고 싶으면 먹는 거고 안 먹고 싶으면 그냥 안 먹어도 되는 거지 어떻게 하루에 세 번씩이나 밥을 먹냐며, 왜 자꾸 먹으라 하는지 모르겠다고 오히려 화를 낸다.
기분이 좋을 땐 장난기 그득한 아이 같다가도 신경질 부리며 화를 낼 때는 저 연세에도 아직도 대단하다 싶다. 평소 같으면 나도 한소리라도 더 했을 텐데 머리가 너무 울리고 기운이 없었다.
온 김에 청소나 해야겠다고 청소기를 꺼내 돌리는데 이제는 청소기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고 화를 낸다. 혼자 사는데 청소할게 뭐가 그렇게 많다고 아침부터 시끄럽게 청소기를 돌리느냐고. 먼지가 하나도 없다고 기어코 당신 손으로 코드를 뽑아 베란다에 청소기를 갖다 놓았다. 휴, 졌다, 졌어.
나는 화장실 쓰는 척하며 들어가서 솔질을 했다. 그래도 지난주에 와서 청소해놓고 가서 인지 화장실은 그런대로 깨끗했다. 변기랑 세면대만 청소하고 새 수건을 걸어놓고 나가려는데 문 밖에서 또 화가 나셨다. 이번엔 또 뭐가 그리 맘에 안 드는 건지. 청소한 게 아니라 볼일 봤다고 둘러대며 얼른 나왔다.
며칠 동안 사무실에도 못 나간 탓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고 애들 오기 전에 병원에도 들릴 계획이었다.
가방을 메고 운동화에 발을 밀어 넣으며 국 데워서 점심은 꼭 챙겨 드시라 했더니 다시 화가 올라오려나보다.
| 에헤이! 참... 그런 말 하지 말고 그냥 빨리 가라!
딸내미 말 좀 들으면 어때서. 네 네~ 갑니다, 가요.
요즘 들어 아빠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아빠와의 대화가 잘 연결이 되지 않는 느낌이다.
워낙에 고집이 세기도 하고 성미도 급한 데다 불같은 성격이라 원래도 말이 잘 통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아빠가 무슨 말을 하려 할 때 별 것 아닌 말도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그렇다고 해서 눈에 띄게 뭔가 이상하다거나 누가 봐도 눈치챌 만큼의 특이점은 없었다. 아빠를 잘 아는 우리 딸들만이 느낄 수 있는 미세한 변화 정도였다.
당신 스스로도 뭔가 답답한 건지 부쩍 짜증이 많아졌고 툭하면 화부터 냈다.
가뜩이나 급하던 성격은 더 급해져서 뭐가 하나 눈에 거슬리기라도 하면 지금 당장 그걸 해결하지 않고는 참지 못했고 어김없이 화를 냈다.
그럴 때마다 멀리 있는 언니에게 전화를 했고 언니는 나에게 전화해서 아빠에게 가보길 부탁했다. 어차피 언니는 당장 올 수가 없으니 그냥 바로 나에게 전화해라고 했더니 새벽부터 저녁까지 시간도 없이 전화가 왔다.
하... 그동안 이걸 당장에 오지도 못할 언니에게 다 하고 있었던 건가.
아빠가 전화를 건 대부분의 목적은 그리 다급한 상황은 아니었다. 물론 아빠는 답답했을 수도 있겠지만 아이들의 등원 준비를 하거나 일을 하던 중의 내 입장에서는 최소한 그랬다.
멀쩡히 잘 보던 TV 드라마 채널이 없어져 아무리 돌려도 안 나온다거나, 상하로 잘만 움직이던 에어컨 날개가 갑자기 멈춰서 위로만 바람이 나간다거나, 전기밥솥 터치화면이 조명이 켜졌다가 조금 있으면 꺼져서 다시 눌러야지만 불이 들어온다거나, 냉장고에서 윙~ 하는 소리가 나다 말다 해서 잠을 못 잔다거나, 베란다에 블라인드가 떨어졌는데 밖에서 우리 집이 훤히 다 보여서 그냥 두면 안 된다거나, 그저께 분명 핸드폰 충전기를 새로 사다 놓고 왔는데 새 충전기는 대체 어디에 두시고 그전과 같은 이유로 또 충전이 안된다던가, 늘 누르던 단축키를 눌렀는데 자꾸 다른 사람이 전화를 받는다던가, 니는 3번이고 나는 6번을 눌렀는데 왜 자꾸 네가 전화를 받냐는 등의...
그러면 급한 대로 리모컨의 9번을 눌러보라거나 에어컨 날개를 손으로 직접 내려보라거나 밥솥의 화면은 원래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꺼진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봐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지금 당장은 갈 수가 없으니 급한 것만 해 놓고 조금 있다 가겠노라고 하면 그냥 오지 마라며 화를 내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렇다고 열 일 다 제쳐두고 매번 바로 달려갈 수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아빠가 그렇게 전화를 끊을 때마다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숨이 막혔고 나는 또 보이지 않는 그림자에 쫓기게 되었다.
딱히 부탁할 사람도 없었고 어차피 내가 아니면 갈 수 있는 사람도 없었기에 결국 내가 해야 하는 내 일이었다.
지금 가지 않으면 아빠는 더 화가 나서 또 전화가 올 것이었고 그냥 얼른 가서 해결한 다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빨리하면 되는 거였다. 그래, 그렇게 하자.
아빠의 문제들은 전등을 갈거나 설치하는 것 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몇 분 안에 해결이 되는 가벼운 것들이었다.
손끝이 둔해져서 작은 버튼을 잘못 누른 경우가 많았는데 해결이 되고 나면 뭐 그리 쉽게 되냐며 허허 웃으시고, 내가 다녀 간 뒤 뭐가 또 안되기라도 하면 내가 잘못 만져서 그런 거라고 또 호통을 쳤다. 그러면 다시 가서 해결하고 돌아오는 일이 반복되었다.
잘못한 것도 없이 자꾸 혼이 났고 아빠가 허허 웃으면 나의 서운하고 속상한 마음도 강제로 종료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