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벌은 훈육의 방법이 될 수 있을까.
국제구호단체 '세이브더칠드런'이 정치후원금을 '사랑의 회초리'에 비유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홍보물이 체벌을 미화해 아동복지법에 위배된다며 홍보물의 사용 중단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고 하죠.
'사랑의 회초리'라는 말이 내가 낳은 자식을 사랑한다면, 때릴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며, "체벌은 사랑이 아니라 아동에 대한 폭력이며 심각한 아동학대의 시작점이므로 '사랑의 회초리'는 폐기돼야 할 용어"라고 지적했다고 해요.
체벌의 필요 여부에 대한 의견도 각자 다르고, 또 체벌이 필요하다면 체벌 수위에 대한 의견도 각자 다르겠지만, 필자는 '세이브더칠드런' 측 의견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하나도 안 무서워요.
초등학교 1학년 남자아이였어요.
그 아이는 1학년 특유의 생긋함을 지닌 동시에, 익살스러움이 가득한 특유의 장난기도 함께 지닌 아니었어요.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장난기는 반 분위기를 때로는 화목하게, 때로는 왁자지껄 웃음 짓게도 만들었지만,
유독 그 장난기가 지나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날에는, 다른 아이들의 불만에 찬 신고와 볼멘소리를 종일 들어야만 했어요.
타고난 성품은 곱디 고운 아이였어요.
곰살궂게 새살거리며 이야기할 줄 알았고, 그 능력으로 우리 반 분위기를 좌지우지할 만큼 그 아이가 내뱉는 말 한 마디에 아이들은 까르르 웃을 수 있었어요. 주말을 보낸 후엔, 주말에 있었던 이야기를 세세하게 제게 들려줄 만큼 누구보다 대화를 즐길 줄 아는 아이였어요. 아이는 또래에게서 인지도가 높았고, 따라서 인기도 높았어요.
그런데,
그 아이에게 안타깝게도 특별한 단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 아이는 선생님의 훈육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아이에게 아이의 잘못된 점을 단호하게 일러주어도, 아이는 꿈쩍도 안 할 만큼 무던했어요.
마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는 아이 같았죠.
마땅히 반성해야 할 점을 아이가 반성하지 않으니, 아니 반성할 생각도 없어 보이니,
교사인 제 마음은 타들어갑니다.
다른 아이들에겐 충분히 효과가 있는 훈육이 그 아이에게는 바위에 내리치는 계란 격이니까요.
바위와 같은 아이의 마음 상태에 맞는 보다 강한 훈육방법으로 아이를 꾸중하자니, 나머지 아이들에게는 지켜보는 것 그 자체로 큰 공포가 될 리 분명하니까요.
저는 결국 아이에게
자리에서 일어나, 뒷 게시판에 가서 서서 생각을 정리하라는 벌을 주었고,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뒷 게시판으로 터벅터벅 걸어나가 뒷짐을 지고 섰어요.
아이는 의미 없이 몇 분간을 벌을 섰지만, 그것도 효과가 있어 보이진 않았어요.
잠시 후, 아이는 말해요.
선생님은 하나도 안 무서워요.
선생님이 자신을 꾸중할 때도 무섭지 않냐 물으니,
아이는 자신의 엄마, 아빠가 선생님보다 몇 배는 더욱 무섭다며 일일이 에피소드를 나열했어요.
아이에게 들은 이야기는, 자신의 부모님에게 주로 체벌을 당한 이야기였어요.
아이는 자신의 이런 무용담을 자랑하듯 내놓았지만,
결국 아이는 부모의 체벌에 대항한 자신을 자랑스러워할 뿐,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거나, 부모님에 대한 경외감이 샘솟았다는 느낌은 전혀 받을 수 없었어요.
네.
저는 확신하건대,
어떤 이유에서건, 체벌은 아이를 변화시키는 데에 장기적으로 효율적인 방법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기간에 아이에게서 잘못을 고백받거나, 앞으로의 옳은 다짐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그건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방패막이로서의 고백이고, 딱 그 정도의 다짐에 그칠 뿐이에요.
아이의 진심을 듣고, 또 속마음을 듣고, 아이의 마음 가득한 각성의 의지를 이끌어내는 데에,
체벌은 전혀. 매력적인 도구가 될 수 없어요.
체벌이라는 험악한 도구로 꾸중을 받은 경험이 많은 아이는,
그렇지 않은 다소 비효율적인 도구, 그러니까 약한 강도로 꾸중을 받을 때, 상대방이 나를 꾸중하는 의미를 깊게 헤아리기가 쉽지 않게 되죠.
안타깝게도 체벌도 항생제처럼 우리 몸에 반복적인 패턴이 생겨서 내성이 생기니까요.
그래서 아이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선생님은 하나도 안 무서워요.
꾸중하는 주체가 '무섭기'때문에, 반성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섭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복종해야 해서 반성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순간 교실 뒷 게시판에 서 있는 동안,
아이로 하여금 다시금 바르게 생각할 시간적 여유를 갖게 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남자아이이기 때문에 체벌해도 괜찮다고요?
아들리 마면 맞아도 될까요?
잘못을 저지르는 주체가 '아들'이건, '딸'이건, 체벌은 그 시작부터가 옳지 않습니다.
체벌로 인해 아이가 효율적으로 '반성'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체벌로 인해 효율적으로 '잠시 굴복'하는 것뿐이니까요.
체벌은 권력에 잠시 '굴복'하는 법만 가르칠 뿐입니다.
정말로 이성적으로,
아이의 잘못에 무게를 정확히 달 줄 알아서,
딱 그 정도 만큼만의 체벌을 할 수 있는 부모라면, 체벌을 용납할 만 하지만-
사실 아이를 꾸중하는 부모의 마음에 1mg의 내 개인적인 속상한 감정이 섞이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아이를 꾸중하는 마음에, 절대적으로 투명한 내 관용만을 베풀 수는 없습니다.
아이를 꾸중하는 엄마의 마음은 '속상한' 엄마 내면의 마음이 기본으로 깔려있으니까요.
속상한 마음에 1절, 더 속상한 마음에 2절, 내가 원하는 아이의 반응이 아니라서 3절, 결국엔 화가 화를 불러 4절. 아이를 꾸중할 때 나도 모르게 애국가 4절까지 읊어가며 꾸중하는 자신의 모습. 모두 한 번씩은 겪어보셨잖아요.
가정과 학교에서 겪어본 제 경험상,
제가 생각하는, 아이를 꾸중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아이가 잘못한 순간, 아이를 공간적으로든. 시간적으로든 그 순간에서 즉각 분리시키는 방법입니다.
그 잘못의 구덩이에서 아이를 재빨리 구해내 다른 공간으로 아이를 분리시키는 겁니다.
"잠깐. 엄마랑 살짝 이야기 좀 해볼까."
"앗. 이 쪽으로 와서 다른 생각을 좀 해보는 게 낫겠다."
"잠깐. 그렇게 화낼 필요 없어. 잠깐 엄마랑 이야기해보면 알게 될 거야."
"어? 지금 네가 한 말, 다시 생각해봐."
"어라. 지금 네 행동은 좀 보기 안 좋은데? 지금 왜 네 기분이 안 좋은지 따로 이야기해보자. 엄마가 들어줄게."
물론 이 물음에, 한 번에 자신의 화를 누그려 뜨리거나, 잘못을 한 번에 인정하는 아이는 많지 않아요.
한 번에 인정할 잘못이었으면 애초에 그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 순간의 위기에 더욱 빠지지 않고 한 발자국 뒤로 와서 장면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면,
아이는 조금 더 슬기롭게 자신의 감정을 읽을 줄 알고, 또 권위에 복종해서 타협하는 일은 줄어들겠지요.
이 과정은 꾸중을 하는 어른에게나, 꾸중을 받는 아이에게나 아주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꽤 많은 연습과 노력이 필요한 일입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아이들은, 아니 아이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그 생명 그 자체로 매우 존엄하므로.
그 자체의 이유로 절대 체벌당해서는 안 됩니다.
그 도구가 매우 아름다운 꽃이라고 할지언정, 아이들을 체벌하는 도구로 누구도 허용할 수 없습니다.
어른들을 위해서도 그래요.
아이들을 위해 매를 드는 시간은 단 한 순간이지만,
매를 들고 난 뒤에 부모의 마음속에는 오랜 기간 지워지지 않은 짐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짐은 쉬이 지워지지 않아, 꽤 오래도록 엄마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니까요.
그 짐을 애써 지우기 위해 쏟는 노력 대신,
매를 들지 않기 위해 고심하는 데 시간을 쓰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니,
꽃으로도. 때리지 말아요.
우리 아이들은...
꽃으로도. 표현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아이들이니까요.
초등교사. 김수현.
닉네임. 달콤 맘.
맘스홀릭 엄마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블로그. 달콤맘의 달콤한 육아, 달콤한 교육
http://blog.naver.com/ggorygg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