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NI Mar 09. 2020

내일은 좀 더 나은 시각으로

<아무튼, 비건>을 읽고

 ‘오늘도 망했다’라고 생각하는 날들이 있다. 가령 하루에 500자 이상 쓰기, 운동 하기, 충동구매하지 않기, sns 오래 보지 않기, 귀 기울여 듣기, 상대에게 불편한 마음 드러내지 않기처럼 생활 수칙을 세우고 실패하기를 반복한다. 사실 다 망한 건 아니지만 잘한 것보다 망한 일에 신경이 곤두서는 걸 어쩌랴. 그러면서도 어제의 실패를 기억하고 다시 리셋된 것처럼 나아간다. 어쩌면 인생은 매일 조금씩 실패하고 있다는 걸 의식하면서 고쳐 나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망했다’고는 하지만 모든 게 끝난 건 아니라는 자조 섞인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의식을 행동으로 당겨 와서 그 둘이 일치하는 아름다운 날은 올까? 의식과 행동의 일치를 실천하며 살고 싶은데 최근 <아무튼, 비건>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지금껏 살면서 ‘동물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까?’, ‘어떻게 소비하고 있었나?’와 같은 질문을 해 보지 않았다. 애초에 동물에 대한 가치관이 있기는 했는지 의심스러웠다.   


  비건을 실천하는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동물에 대한 인식, 사회적 편견과 환경적인 문제, 대안을 풀어낸다. 나는 평소 비건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동물성 제품을 거부하는 사람이라는 생각만 했을 뿐, 의미나 정신에 대해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었다. 책을 읽고 무엇보다 답답했던 건 지금까지 한 번도 소, 돼지, 닭 등을 먹는 나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귀엽고 친근한 생명체로 인식했던 동물을 언제부터 사물이나 소비의 대상으로 여겼는지 모르겠다. 어떤 과정을 거쳐 식탁에 올랐는지 의식하기를 생략한 채 혀의 감각을 먼저 경험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선택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아무튼, 비건>의 부제는 ‘당신도 연결되었나요?’이다. 저자가 말하는 비건과 연결에 대한 견해를 짧게 옮겨 보겠다.  


비건의 핵심은 거부가 아니라 연결에 있다. 비건이 되는 것은 산업과, 국가와, 영혼 없는 전문가들이 단절시킨 풍부한 관계성을, 어린아이였을 때 누구나 갖고 있던 직관적 연결 고리를, 시민들이 스스로의 깨우침과 힘으로 회복하는 하나의 사회운동이다.  처음에는 우리라는 범주에 동물이 있었다. 나와 다르지 않은 생명으로의  인식이 연결의 첫 시작이었다. 나도 과거엔 그랬다. 집에는 다양한 동물 인형이 있었고, 친척 동생들이 놀러 오면 이름을 붙여 주고 인형극을 했다. 이야기 속에서, 포근한 이불속에서 성장을 함께 했다. 어릴 때 시골 할머니 댁에서 가까이 본 소는 속눈썹이 길고 눈이 투명 하리만치 맑았다. 초등학생 때 학교 앞에서 파는 병아리를 데려와 키웠는데 덩치가 커진 어느 날 엄마가 시골에 보내자고 했다. 공기 좋은 곳에 살면 더 잘 자랄 거라는 말에 순수하게 수락을 했다. 처음으로 우리 집에 온 강아지 윙키도 잊을 수 없는 가족이었다. 책에서는 아이가 동물을 바라보는 시선을 타자화가 되기 전의 모습이라고 전한다. 동물을 ‘남보다 못한 남’이나 사물과 물건으로 취급하기 전을 뜻한다. 누구에게나 존재했던 맑은 사고와 눈이다. 그러나 아기돼지 삼형제를 보며 자란 아이는 자연스레 식탁 위에 놓인 수육, 소갈비찜, 닭 볶음탕 등을 먹으며 어른이 된다. 동물 제품을 먹으면서 나도 모르게 어떤 건 먹을 수 있고 어떤 건 가족이라고 구분 지었다. 동물에 대해 선택적으로 의식했다고 보는 게 맞겠다. 마음대로 연결 지었다가 상황에 따라 단절하며 살아온 것이다.


  동물에게 의식이 있다는 사실만큼 명료한 충격이 있을까. 모든 동물에게는 의식과 통점이 있는데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와 개, 축사에서 자라는 닭 오리 소 돼지의 운명은 판이하다. 태어나자마자 생산성이 없다는 이유로 수컷 병아리를 산 채로 갈아 죽인다는 내용을 보았다. 생명의 존폐 여부가 그저 인간의 필요에 따라 결정되는 동물의 삶이 너무 가혹하다. 예전에 한 프로그램에서 축사에 있는 소를 쓰다듬으며 클래식을 들려주는 장면을 봤다. 좋은 음악을 들려주면 소의 등급이 올라간다는 실험이 담긴 내용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하고 잔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동물이나 식물도 선한 말과 마음으로 대하면 좋음과 싫음을 감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더 무서운 건 내가 그 프로그램을 신기하게만 봤다는 사실이다. 지인 중 한 명은 닭과 오리 같은 조류를 아예 못 먹는다. 어릴 때 시골에서 닭 잡는 걸 봤는데 얼굴에 피가 튀었다고 한다. 목이 비틀어지고 산 채로 털이 뽑혀 난도질된 닭의 고통이 감각으로 각인된 탓에 입에도 대지 않는 것이다. 반면 돼지와 소는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만약 회식 장소가 오리 고기 집이라면 홀로 삼겹살을 굽는 식이다. 보지 않은 것은 선택적 의식(타자화)이 가능하다는 공식이다. 나 또한 알면서도 외면했거나 선택적으로 당연시 여겼다.    책장을 덮으며 메스꺼움을 느꼈다. 며칠은 육류에 입도 대지 않는데 지금도 그렇다. 아직까지는 의식이 먹어 본 경험을 이기고 있다. 한편으로는 늘 먹던 음식, 구두, 가방, 옷, 심지어 화장품까지도 동물을 배제한 제품이 별로 없어서 막막하다. 모르는 만큼 알아야 할 것도 많아 보인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비건 제품을 파는 곳이나 레스토랑이 꽤 보였다. 단지 먹는 것에 대한 제한적 태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적어도 작가가 말한 연결을 이해하기 위해 동물이 어떤 환경에 살고 도축되는지 알고 싶다. 잔인하고 두려운 진실을 두 눈 뜨고 바라 볼 예정이다. 이제껏 비건이라고 하면 건강한 생활을 누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중요시 여기는 사람의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동물이 아닌 인간의 입장으로만 이해하고 유별나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도 연대 의식이 있듯, 동물과 인간이 고유한 생명체로 연결되어있다는 대전제를 기억하는 것이 비건의 시작인 것 같다. 동물도 나처럼 시원한 바람을 좋아하고, 맞으면 아픈 존재라는 당연한 사실을 기억하면 된다.


  누군가 내게 30년 넘게 잘 먹고 왜 이제 와서 그러느냐고 묻는다면 <아무튼, 비건>을 읽어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연결은 연민이 아니라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하루아침에 비건이 되겠다는 거창한 결심을 드러내려는 게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선택해 온 것에 대해 되짚어 보면서 조금씩 동물에 대한 시각을 바꾸고 싶다. 30년 넘게 동물을 사랑하면서도 소비해 온 나로서는 이제야 의식하게 되었다. 안일하게 결정할 수 있는 것들에 눈을 흐리며 모른 척하고 싶지 않다. 지금껏 망했지만 내일은 좀 더 깨인 눈으로 바라보고 싶을 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