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으로 끝나도 좋을 우동을 먹은 적이 있다. 남편과 음악 페스티벌에 가던 중 지하철 환승 역에서 갑자기 배가 고파서 역 안에 먹을 만한 것이 있나 헤매다가 토스트 가게가 보였다. 마침 안에 있던 주인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는데 진한 핑크색 베레모에 스팽글이 잔뜩 달린 바지에 시선이 가서 어정쩡하게 자리에 앉아 버렸다. 한눈에 봐도 두꺼운 파운데이션에 넓게 바른 핑크색 아이쉐도우, 새빨간 립스틱까지, 사장님은 가게 문을 닫고 곧 무도회장에 가야 할 것 같은 차림이었다. 아마 자신을 꾸미는 데 있어서는 취향이 분명한 사람인 것 같았다. 토스트가 먹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마침 메뉴에 우동이 있어서 두 그릇을 시켰다.
아주머니는 주섬주섬 플라스틱 우동 그릇을 꺼냈다. 그녀의 베레모 색과 닮은 핑크색이었다. 그런데 서 너 명이 일렬로 앉는 자리에서 바라본 모습은 어딘가 수상쩍었다. 우동을 끓일 기미가 안 보이고 자꾸 우리 쪽을 신경 쓰는 느낌이랄까. 보여주기 싫은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 같았다. 다른 정리를 하는가 싶더니 보이지 않는 아래쪽에서 우동 면과 수프를 꺼내 그릇에 넣고는 그대로 물을 부었다. “물을 안 끓여!! 어떻게 만들려는 거지?” 나는 외계어 비슷한 어눌한 발음으로 옆 사람에게 속삭였고 남편도 팔꿈치로 불안의 신호를 보냈다. 우린 신경 안 쓰는 척하면서 온 신경을 그릇에 쏟았고, 알고 보니 마법은 전자레인지에 있었다. 숫자가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도 따로따로 요리(?)되는 걸 보면서 곧 저 우동을 먹어야 한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소스를 푼 물이 끓으면 면을 넣고 2분이면 완성되는 마트표 우동이 생각났고, 당장 플라스틱 그릇에서 배출될 환경 호르몬이 걱정됐다. 별별 생각을 하는 사이 아주머니의 화려한 옷과 메이크업, 그녀를 닮은 핑크색 그릇은 더 이상 특별한 취향으로 보이지 않았다. 눈 앞에는 뜨겁지도 않은, 불어 터진 우동만 있을 뿐. ‘옷을 화려하게 입은 사장님이 음식도 잘할까?’ 우동을 먹기 전 스치듯 그런 생각을 했다. 겉모습으로 음식 맛을 연결 짓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약간의 기대감이 있었다. 가령 포장에 신경을 쓴 물건이 늘 만족스러운 건 아니지만 별 것 아닌 것을 별 것으로 보이게 하는 재주가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다. 맨얼굴인 내용이 니즈(욕구)를 만족시켜야 외양 또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기대해야 하는 본질—맛있는 음식에 대한 욕구—에서 벗어난 상상을 한 것이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자연스레 쉬운 선택을 한다. 지인의 대학원 졸업 기념 꽃을 사려고 동네 꽃집에 갔을 때의 일이다. 예약만 하고 올 거라 트레이닝 바지에 매일 입는 오리털 점퍼를 걸치고 모자도 푹 눌러쓰고 갔다. 그날은 왠지 노란 튤립을 선물하고 싶어서 꽃이 있는지 물었더니 사장님은 “튤립은 없어요. 내가 안 좋아해서 튤립은 안 갖다 놔”라고 했다. 그냥 없다고 해도 이해할 텐데 부연 설명이 썩 유쾌하지 않았지만 노란 장미를 추천받자마자 눈에서 하트가 나왔다. 원래 하이톤의 목소리에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서슴없이 아들 이야기를 할 만큼 친화력이 있는 사장님이라 표현 방식의 다름으로 이해했다. “얼마 생각해요?” 돈에 맞춰서 어울리는 꽃을 추가하겠다는 말이다. 이 꽃집의 방식이다. 2만 원 정도로 생각한다고 했더니 사장님이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쓰는 김에 조금 더 써요. 3만 원 정도는 돼야 풍성해”라고 했다. ‘내 몰골이 돈 만 원을 더 쓰지 않을 걸로 보이는 건가.’ 괜히 억한 심정에 카드를 내밀었다. 서 너 시간 후 졸업식에 가기 위해 화장을 하고 옷을 갖춰 입은 후 하이힐을 신고 다시 꽃집에 갔다. “아까 예약한 노란 장미 찾으러 왔어요 “ 사장님은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봤다. 그것도 티가 나는데 역시 사장님 답게 “어머머, 아까랑 완전 다른 사람이 왔네.”(다시 위아래로 봄) “준비 다 됐어요. 아주 예쁘게 나왔어”라고 했다. 오전에 내가 느낀 억한 심정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스스로를 봐도 꾸미지 않을 때와 꾸몄을 때의 온도차가 크긴 하지만 씁쓸한 기분이 들었던 건 왜일까. “좋은 하루 보내세요 “ 인사를 하고 나오며 오전의 칙칙했던 나와는 다른 자신감을 느꼈다. 그런 것에 얄팍한 자신감을 느끼는 나도 사장님과 크게 다른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이런 일에는 오랜 이력이 있다. 알게 모르게 겉모습으로 남을 평가할 때가 있고, 내 쪽에서도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았다. 나는 옷을 좋아하고 꾸미는 데 관심이 많은 사람인데 나만의 멋이라고 단정 짓기에 애매모호한 부분도 있다. 시선, 누군가의 평가, 무언의 편견은 떠다니는 먼지 같아서 숨 쉬듯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잘 보이지 않는 먼지를 일일이 신경 쓸지 말지에 달렸다. 일부 사람들은 머리가 작은 사람에게 ‘머리가 주먹만 하다’고 하거나 다리가 길면 ‘학다리’, 몸매가 예쁘면 ‘비율이 좋다’, 예전 식으로는 ‘콜라병 몸매’ 등 외모와 신체에 관한 말을 한다. 인터넷 오픈사전에는 ‘얼굴 평가’를 줄인 ‘얼평‘이라는 단어가 있고, 지식인에는 ‘얼평 부탁해요’ 같은 질문도 보인다. 외국에서는 머리가 작다는 표현이 실례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지능이 떨어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고. 이렇게 겉모습을 대체하는 말이 일상생활에 녹아 있고, 칭찬을 가장한 평가를 스스럼없이 하는 분위기가 존재한다는 건 피로와 무력감을 일으킨다. 그런 종류의 말은 딱 그만큼의 인식을 담은 단층적 사고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우리 이미지란 단순한 겉모습이고, 그 뒤에 세상 시선과는 무관한 우리 자아의 실체가 숨어 있을 거라고 믿는 건 천진한 환상이야. (중략) 우리 자아는 포착될 수 없고, 묘사할 수 없으며, 흐릿한, 단순한 한 외양인 반면, 너무나 포착하기도 쉽고 묘사하기도 쉬운 유일한 실재는 바로 타인의 눈에 비친 우리 이미지라는 걸 말이야.
밀란 쿤데라의 책 <불멸>에 적힌 위의 문장들은 어딘가 풍자적으로 다가온다. ‘세상의 시선과는 무관한 우리 자아의 실체’는 오히려 한 가지 모습만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포착될 수 없고 ‘, ‘흐릿한’ 것이 아닐까. 나조차도 얼마나 많은 내가 있는지 아직 모르겠다. 남편, 가족, 친구, 직장에 있을 때의 나는 조금씩 달라서 스스로가 낯설 때도 있다. 그러니 내가 보는 타인의 모습도 한 사람이라는 우주 중 일부분을 아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동시에 ‘타인의 눈에 비친 이미지’ 도 그렇다. 책으로 치면 중장편을 서문 혹은 한 문장만으로 이해했다고 판단하고 책장을 덮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날 지하철 환승역의 우동을 또 먹으러 갈 일은 없겠지만 가게 밖의 사장님은 친구들 사이에서 멋쟁이로 불릴 상상을 해본다. 꽃집 사장님은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수완을 가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를 따져도 꽃을 잘 만지는 건 인정하기 때문에 또 꽃집을 찾을 예정이다. 분명한 건 내가 봐 온 이미지와 판단은 그저 포착된 순간이며 일부분이라는 사실이다. 타인이 나에 대해 갖는 이미지와 판단도 다를 바 없다. 보이는 삶은 쉬운 얼굴을 한 동시에 매정하다. 그럴수록 사고(思考)를 풀어진 넥타이처럼 두는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