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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Aug 31. 2017

 흩어지지 않을 글쓰기

무엇이든 쓰던 시절이 있었다. 중학생 때부터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다. 친구의 생일, 시험 일정이나 사고 싶은 것들을 적고 좋아하는 가수의 노랫말을 베끼거나 일기를 썼다. 그렇게 이것저것 쓰다 보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 졌다. 텅 빈 종이에 TO에서 FROM으로 끝나는 편지를 쓸 때 말과 말 사이의 여백에서 한참을 머무르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글씨 때문에 새 종이를 꺼내기도 했다. 어떤 편지는 끝내 부치지 못한 채 혼자만의 기록이 되었다. 전화번호를 쓰기 위해 종이와 펜부터 찾던 적도 있었다. 번호가 적힌 쪽지를 손에 쥐고 공중전화에서 동전이 닳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의 쪽지는 가장 빠르고 설레는 매체였다. 비밀스럽게 접힌 쪽지를 열어볼 때의 기분은 분명 메신저에 비할 수 없는 짜릿함이 있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에 번번이 부딪힐 때 빈 종이에 낙서를 하거나 아무 말이나 적다 보면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해졌다. 종이에 연필촉이 닿을 때의 사각거리는 소리도 좋았다. 어쩌면 성장 과정의 꽤 많은 쪽수를 쓰는 일에 소비한 셈이다.   


기록은 작지만 단단한 이야기가 돼 주었다. 간단한 일기든 호기롭게 세운 계획이든 그렇게 쓰기 시작한 기록들은 일상을 버티는 마음, 부풀어 오르는 기쁨, 자연을 바라볼 때의 경외감과 같은 감정의 결을 글로 옮기고 싶다는 욕구로 확장되었다.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은 자연스레 책 읽기를 동반했다. 좋은 글귀를 만나거나 생각지도 못한 표현을 읽을 때는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말은 말로서 갖는 힘이 있지만 정말 하고 싶던 말을 꺼내는 순간 부피가 줄어드는 기분을 느낄 때가 많았다. 늘 공중에 흩어진 말에 마음이 소진되고 말 때, 읽고 쓰면서 언어의 온도와 빛깔을 담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년 전 갑작스레 아빠를 영영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이제껏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이별이 만나야 할 감정적 이유의 사라짐이 아닌 완전한 부재임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역설적인 것은 시간이 지나 아빠의 부재가 나의 살아있음을 더욱 극명하게 했다는 점이다. 늘 보고 싶고 그리운 모든 순간이 홀로 존재함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이별을 오래 응시하고 싶었고 그때마다 글을 쓰고 싶었다. 아빠는 신문이나 책을 읽다가 좋은 글이 있으면 꼭 필사를 하거나 몇 번이고 나를 불러 보여주었다. 그래서 아빠의 유품에 있던 노트에는 혼잣말 같은 사랑의 말과 하루를 견디게 한 말들이 꾹꾹 눌러 담은 필체로 적혀 있었다. 점 하나도 힘주어 쓴 글씨에서 나는 사랑을 느꼈다.


박준 시인의 산문집인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에서 ‘어떤 말은 죽지 않는다.’라는 글귀를 읽다가 어쩌면 우리의 말과 글은 언제든 유언이나 유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누군가의 말과 글을 허투루 대하지 않기로 했다. 오랜 시간 기록하고 쓰면서 일상에서 길어 올린 생각을 글로 표현했을 때 누군가의 마음에 머무는 상상을 했다. 꼭 대화하거나 만나지 않아도 기분 좋은 접점을 만들 수 있는 힘이 글에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어떤 말은 죽지 않는다는 시인의 생각처럼 어떤 글 또한 누군가에게는 죽지 않고 남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쓴다는 일은 내게 만약의 일이 되어버렸다. 꾸준히 쓰는 일을 통해 누군가에게 닿을 만약의 가능성을 점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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