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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I Aug 28. 2017

나의 잠실 주공아파트




 장마가 끝나고 막바지 여름 더위가 들끓었던 지난 7월, 고속 터미널 쪽을 지나 신호 대기를 하던 중 창 밖에 키 큰 나무가 있어서 습관처럼 보는데 그 옆에 주공아파트가 있었다. 늘 지나던 길인데도 훤칠한 아파트들과 교통 체증 때문에 그 존재를 몰랐다. 검색을 통해 이곳이 예전에 재개발이 끝난 2,3단지에 이어 마지막 순서를 앞두고 있는 반포 주공 1단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릴 때 매일 보던 주공아파트의 로고는 칠이 다 벗겨져 있었고, 비둘기색보다도 흐려진 회색빛 아파트를 보며 사람이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유심히 보니 베란다 쪽에 쌓여있는 짐들과 빈 옷걸이가 누군가 살고 있다는 흔적을 대신하고 있었다. 갑자기 잠실의 주공아파트에 살던 기억이 나서 짧은 신호대기 사이에 사진을 한 장 찍어두었다. 태어나자마자 1단지에서 살다 3단지에서 국민학교 시절을 보낸 잠실 주공 아파트. 80년대에 태어나 서울이 고향인 사람을 '아파트 키즈'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르신들이 가끔 고향을 물어볼 때 조금 불안한 듯 잠실의 아파트를 대답하면 늘 거기서 질문은 끝이 났다. 반포 1단지 주공아파트를 보자마자 서랍장 안 깊숙한 곳에서 옛날 일기장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내가 썼는데도 잊고 있던 일기장의 내용을 신기하게 보듯 까마득한 그때의 내력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주말과 명절에 가족들과 집을 비우지 않는 이상 1980년대에서 90년대까지 나의 12년은 늘 잠실 주공아파트와 함께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신도시인 경기도 분당으로 전학을 가기 전까지 가족, 친구들과 성장의 살을 함께 비비던 곳, 단지가 미음 형태로 되어 있어서 외따로 떨어진 단지 없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동네였다. 학교가 끝나면 책가방 안에 든 필통 소리를 달그락대며 집에서 200미터 거리의 슈퍼에 꼭 들렀다. 바깥보다 어두워지는 좁은 내리막에 들어서면 한쪽엔 쥬쥬와 미미 인형의 옷이 종이 상자 안에 그득했고, 탱탱 볼과 유리구슬과 같은 장난감이 내리막의 가속도를 붙들곤 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비로소 네모반듯한 슈퍼가 나오는데 형광등을 제때 갈지 않아서 늘 어두침침했다. 좋아하는 죠리퐁이나 뻥이요, 500원짜리 어포를 골라 가져가면 주인아줌마는 꼭 침을 바른 손으로 봉지를 뜯어서 물건을 담아 주셨다. 집으로 가는 길의 왼쪽 단지에는 체르니 30을 억지로 끝낸 피아노 집이 있었고, 맞은편인 우리 옆 라인에는 향이 끝내주던 복숭아나무가 있었다. 매년 과실이 열릴 때마다 부러운 듯 쳐다보았지만 우리 현관에는 양옆으로 초여름부터 분꽃이 자줏빛으로 꽃을 피워 그걸로 만족이었다. 토끼 똥을 닮은 분꽃 열매를 만지작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여름에는 아파트의 차가운 돌계단에 앉아서 쭈쭈바를 먹고, 집에 있을 때면 초인종 대신 이름을 부르는 친구 목소리에 문구멍으로 방문자의 신분도 확인하지 않고 맨발로 뛰쳐나갔다. 당시엔 아파트에 떠돌이 개가 많았고 쥐가 현관을 경계로 하여 화단을 재빠르게 다녀서 단지를 나설 때 늘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나는 또래보다 키가 작았지만 고무줄놀이를 잘했다. 지나가던 동네 아줌마들이 작은 고추가 맵다고 할 때면 수학 문제를 잘 푼 것보다 기분이 좋았다. 겨울에 집 안 전체가 연기로 희끄무레해지면 엄마가 연탄을 갈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비염이 심해서 반응이 조금 늦기는 했어도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문을 여닫는 것은 큰딸인 내 몫이었다. 오래된 나무틀에 싸여 있던 창문은 꼭 덜컹거리는 소리를 튕기고 나서야 열렸다. 가끔 부모님이 다투는 목소리와 늘 같은 시간에 보던 만화 영화의 주제가, 과자 봉지를 뜯는 경쾌한 소리,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를 할 때 떼로 불렀던 노래, 두부장수 아저씨의 종소리와 계란장수 아저씨의 운율감 있던 목소리, 밤에 집으로 돌아가던 골목에서 귀신이 따라올까 봐 쿵쾅대던 발자국 소리. 이 모든 게 유년의 소리였다.  


전학을 가던 날 나를 포함해 삼총사로 불리던 두 친구가 팬시점에서 분홍색 리본 핀을 선물해 줬다. 우리 셋은 세상이 떠나갈 듯 부둥켜안은 채 울었고 전학을 가서도 한참 편지를 주고받았다. 키카 큰 한 친구는 편지 내용에 늘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처리해준다는 재밌는 말을 써 주었는데 어린 마음에 든든한 위안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을 들여다보니 조만간 철거될 반포 주공 아파트의 모습은 내 기억과 관계없이 초라해 보였다. 살던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꽤 상실감이 크다는 것도 주공 아파트를 통해 알았다. 2000년대가 되면서 잠실 주공아파트가 재개발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후에 대학생이 되어 다시 찾은 잠실은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공간은 모조리 바뀌었지만 미관을 해치지 않아 그대로 둔 오래된 수목 몇 그루가 그곳에 주공아파트가 있었다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분명 그 잠실은 맞는데 내 기억을 뺀 나머지는 모두 낯설게만 느껴졌다. 사방에 들어선 아파트의 층수를 세어보다가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아파트에 포위당한 기분을 느끼면서 한참 같은 장소를 헤맸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고향을 잃어버렸다고 말하기 애매한 상황이 되었지만 이제 잠실 주공아파트의 모습을 기억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주공아파트에서 보낸 유년시절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우연히 기억을 더듬다가 다시 섬광처럼 빛난다. 지금을 산다는 것은 잊을만하면 밀려오는 기억의 무게를 견디는 일이기도 하다. 그 기억들은 우리의 세포 어딘가에 늘 살고 있는데 매일을 사는 일에 홀려 무게를 의식하지 못하다가 어떤 순간에 번쩍 떠오르는 것이다. 나이 지긋한 분들은 마치 매일 기록해온 것처럼 과거의 일들을 기억하고 끊임없이 이야기로 풀어내곤 한다. 지금을 살고, 조금씩 낡아가면서도 기억하고 싶은 것들의 무게를 안고 사는 것이다. 앞만 보며 사는 내게 이런 기억의 무게를 의식한다는 건 너무도 반가운 일이다. 가끔 돌부리에 차이듯 기억에 차일 수 있는 삶. 그래서 미소 지을 수 있는 순간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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