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돌보기
“승연 님은 자유롭고 싶은 새라고 볼 수 있어요.”올 초 엄마가 한 번 가보자고 해서 따라간 철학관에서 들은 말이다. 세상에 자유롭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내 이야기인 것만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하는 말에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해서가 아닌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는 아니었다. ‘서늘한 마음썰’이란 팟캐스트에서 나는 내 마음대로 살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70프로 이상은 그렇다고 대답하고 있었다. 사실 30프로뿐인 불안에 잡힐 때가 더 많다. 그렇다고 영영 방을 뺄 기미가 없어 보이는 불안의 지분만 생각하면서 산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달리 생각하면 불안과 동거하는 삶이 손해만은 아니다. 그 덕에 가끔씩 예상치 못하게 찾아오는 행복이 더 값지고 감사하다. ‘-싶다’를 생각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그것에 사로잡히느라 평범한 하루를 놓칠 수 있다.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잘 산다’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잘 산다는 걸 생각하면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부록이 붙는다. 애쓰게 되고 더 가져서 누리는 삶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기운을 가진 생활을 하고 싶다. 살아있다는 의식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다.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보듬고 집중할 수 있는 힘이다. 마음이 즐거운 일을 하면서 굳이 스트레스를 푼다고 의식하지는 않는 것처럼 저절로 힘이 나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헬스장에 다닌 지 3개월이 되었다. 매일 가지는 못해도 시간이 날 때마다 운동 가방을 챙긴다. 한 시간 정도 근력 운동을 한 후 마무리로 러닝 머신에 오른다. 프로그램을 설정해서 뛰는데 2분 간격으로 경사도와 걷는 속도가 시스템화 되어 있어서 평지를 걷는 것보다 힘들다. 기본 설정으로 맞춘 42분 동안 고비라고 할 수 있는 빠르기가 세 번 지나야 끝이 난다. 천천히 걷다가 평소 속도처럼 걷고 경보를 하듯 걸으며 몸을 예열한다. 그러다가 강도 8의 오르막 달리기를 할 땐 2분이 너무 더디게 느껴진다. 텔레비전 화면에 온 신경을 쏟는 척하지만 초조하고 힘들어서 시간을 보면 고작 1분이 지나 있다. 시간은 죽을 만큼 더디게 흘러간다. 58초, 59초. 다시 숨 고르기. 더 못하겠다 생각하면서도 절대 stop버튼을 누르지 않고 뛰다 보면 다시 평화로운 걷기로 돌아간다. 얼굴이 시뻘게지고 땀이 줄줄 흐르는데 기분은 날아갈 것처럼 좋다.
설정값을 한 것과 힘들면 언제든 스톱 버튼을 누를 수 있다는 걸 빼면 운동은 사는 일과도 닮은 것 같다. 버티고 힘들어하다가도 안주하기도 하고 잠깐 좋기도 하니까. 조금 힘들다 싶은 시간이 쌓이면 어제의 강도에 단련되었다는 걸 느낀다. 그러니 내게 운동은 힘을 내기 위한 힘쓰기이기도 하다. 요즘에는 살 빼기보다 운동을 한다는 단순한 즐거움에 빠졌다. 살 빼기를 이유로 운동을 시작했지만 운동을 하면 할수록 원래의 목적은 희미해지고 있다. (그래서 몸무게가 줄지 않고 있는 것일까?) 그래도 운동을 하기 전보다 체력적으로 덜 지치고 정신이 맑아지는 걸 체감한다. 게다가 보너스로 조카를 가볍게 안을 수 있는 힘도 생겼다.
최근 조카의 배냇짓을 본 건 새로운 경험이었다. 조카가 한쪽 입을 씰룩이고 눈을 찡긋했다. 배냇짓은 아직 사회적이고 감정적인 웃음을 지을 수 없는 갓난아이의 움직임이라고 한다. 중추신경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근육이 움직이는 모습이 꼭 웃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근육이 반응한 것이지만 오묘한 빛을 내는 원석을 들여다보듯 작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배냇짓이 아니더라도 아기의 얼굴은 보는 사람을 무장해제시킨다. 요즘에는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조카의 얼굴을 생각할 때마다 웃음이 난다. 내가 조카 바보가 되다니. 내 안에서 또 다른 에너지 감지 센서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주말 정체가 한창이던 제주도의 도로에서 시간을 보내기 아쉬워서 가장 가까운 곳인 새별 오름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파른 능선을 따라 정상에 오르니 해가 천천히 익어가고 있었다. 물을 탄 듯 희멀건 해는 점점 오래 우린 것처럼 진득하게 넘실거렸다. 풍광에 사로잡혀 사진을 찍고 영상으로 담으려 했는데 역부족이었다. 옆을 돌아보니 나와 같은 장소에서 같은 걸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노을에 잔뜩 물든 사람들의 얼굴은 모든 상념을 잊은 것처럼 평온해 보였다. 꼭 붙어 앉은 젊은 연인의 등과 어깨, 마주 보는 얼굴에도 빛이 스몄다. 몽돌 같은 뒷모습이 너무 다정해 보여서 나도 모르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자청했다.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하늘빛과 그걸 바라보던 사람들. 그리고 그 풍경 속에서 또 다른 풍경을 발견한 듯 기뻐하던 내가 있었다. 제법 어둑해진 오름을 내려오면서 마음이 잔뜩 부풀어 있다는 걸 느꼈다.
철학관에서 말한 것처럼 나는 자유롭고 싶은 새가 맞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로운 새이기도 하다. 이유를 찾지 않아도 되는 일에 마음을 놓을 때 행복이 비친다는 걸 조금씩 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명암이 자주 바뀌어도 사소하고 단단한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 체력을 기르듯 마음을 기르는 일. 일상의 에너지는 마음에서부터 솟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