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밤, 정체가 이어지는 서울 도심에서 탈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가까운 한강에 들르는 것이다. 이촌동 쪽 한강 공원에 주차를 하고 편의점이 있는 3층 전망대의 창가 자리에 앉았다. 꼬리를 문 차들을 등지고 앉아 산책로를 보는데 바깥이 어두워서 유리창 너머의 풍경보다 창에 비친 내 얼굴이 더 잘 보였다. 구운 계란과 기계가 끓여준 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산책을 했다. 희멀겋게 가로등 빛이 내려앉은 강물 위로 한강 대교 위를 지나는 차들이 색색의 빛을 뿌리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고 달리다가 고요한 한강을 곁에 끼고 걷고 있는 게 신기했다. 한강 철교에 가까워질 만큼 걸었을 땐 지하철 칸에 몸을 의지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안식처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문득 지친 표정, 날 선 표정, 아무런 생각이 없는 표정, 달뜬 표정 등 수많은 얼굴이 스쳐서 시선을 붙들었다. 닮은 듯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는 내가 짓는 표정도 있는 것 같았다. 오늘 하루를 치열하게 보낸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 세상에서 가장 편한 얼굴로 잠들 것이다. 그래야 내일을 버틸 힘을 비축할 테니 말이다.
“아 힘들다!”, “너무 힘들다.”
얼마 전 퇴근길 버스 안에서 기사님이 목이 잔뜩 쉰 목소리로 하는 말을 들었다. 앞문을 열고 나갔다가 신호가 바뀌기 전 자리에 앉으며 한 말이었다. 넋두리 같기도 했고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말 같기도 했다. 맨 앞자리에 앉은 나는 머쓱해서 곧 바뀔 신호만 쳐다보고 있었다. 하루 종일 배차 간격에 맞춰 목적지를 수도 없이 순환했을 테니 지쳐 있는 게 당연했다. 기사님에게는 신호 대기 중이라도 잠깐 쐬는 공기가 달 것이다. 더 좋은 건 집이라는 편한 동굴로 들어가는 일. 정류장에 내려 한 번만 건너면 되는 횡단보도에 선 나도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밤공기에 하루의 피로를 툭툭 털어내듯 잰걸음으로 걸었다.
그럭저럭 견딜 수 있는 힘듦 덕에 일상은 버틸 만하다. 어쩌면 화려한 실력과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는 잘 버티는 내공을 쌓아가는 게 성장의 테두리를 차지하는 것 같다. ‘어떤 대상이 주변 상황에 움쩍 않고 든든히 자리 잡다’는 뜻을 가진 ‘버티다’는 동사이다. 그래서 버티는 상태가 아닌 버티는 중이라고 볼 수 있다. “힘들다”를 외치던 기사님도 버티는 중이었을 것이다. 내 경우엔 정말 힘들 때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 편이라 기사님이 소리 내는 모습이 어떤 구호처럼 들렸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버틸 때는 힘이 들어간다. 문제는 그 힘을 쓸데없는 데 소비할 때이다. 내 문제를 핑계 삼아 가까운 사람을 힘들게 하거나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결론 없는 걱정 구멍을 판다거나 스스로를 좀먹게 하는 생각에 갇혀 에너지를 낭비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지 말자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방향으로든 결국 ‘나’로 돌아와야 할 일은 반드시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나서야 잠잠해진다.
아빠는 가족들 앞에서 자주 파이팅을 외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이 안 풀릴수록 더 그랬다. 파이팅을 외칠 때 하이파이브를 하고 마지막에 손을 꽉 잡는 게 버릇이었다. 시간이 흘러 사업이 기울고 병원에 입원하고 영문도 모른 채 집중 치료실로 옮기던 날에도 그랬다. 처음엔 아빠가 속도 없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이런저런 이유로 상황이 힘들다고 솔직하게 말해주길 바랐다. 묻거나 원망하고 싶은 내 눈빛을 파이팅으로 무마했다. 파이팅을 할 때와 하지 않을 때의 긴 간극을 당신은 어떤 눈빛으로 견뎠을까. 이젠 그 말이 스스로를 지지하는 힘이었다는 걸 느낀다.
이쯤 되면 잘 버틴다는 건 스스로를 연마하는 일처럼 보인다. 앞으로도 힘든 건 상황이 아니라 그걸 바라보는 자신에 있다는 걸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배울 것이다. 알면서도 자꾸 속수무책이 되는 모난 감정도 뭉뚝하고 여려질지 모른다. 소설 「햇빛 어른거리는 길 위의 코끼리」에는 취미로 열쇠를 만드는 사람이 나온다. 조금 특별한 건 열쇠마다 맞는 자물쇠를 만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저 열쇠를 계속 만드는데 그 이유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참, 당신에게 줄 열쇠가 하나 있다. 구슬을 꿴 모양을 본떠서 만든 것인데 액세서리로 사용해도 좋고 열쇠고리로 써도 좋다. 이 열쇠에 맞는 자물쇠가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없다. 어디에도 없다. 내 취미는 열쇠를 만드는 것이지 자물쇠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이 세상에는 열쇠로 열리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열쇠가 만들어지면 언젠가는 그것으로 열 수 있는 무언가를 꼭 만나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소설에는 마침표가 찍혀 있었지만 이런 문장을 만났다는 기쁨이 더 컸다. 열쇠를 만드는 사람은 섣불리 자물쇠를 구하지 않는다. 자물쇠가 모든 열쇠의 해결사가 아니라는 발상이 재밌고 역설적이다. 열쇠가 나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나라는 열쇠는 시간이 걸려도 분명 무언가를 열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믿는 힘. 그런 힘으로 버티는 사람은 당장 보이지 않는 자물쇠를 구하려는 조급함과 불안을 키우지 않을 것이다. 열쇠를 만드는 마음은 언젠가 그 가치가 열릴 순간을 품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을 닮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