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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동물 Mar 26. 2020

달리기는 어떻게 요가가 되는가

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하루키처럼, 100k 뛰어볼까”
- 달리기는 어떻게 요가가 되는가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



하루키는 런치광이(run+미치광이)임에 틀림없다. 월 300km 훈련은 거뜬하다. 서맥이다. 그리고 가장 눈여겨볼 증세가 런태기(run+권태기)이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러너스 블루' 말이다. 달리기에 대한 남다른 몰입과 사랑은 애증과 피로로 이어지기도 한다. 러너들의 통과의례라고나 할까. 이 책은 이처럼 달리기에 대한 복잡미묘한 감정이 모두 담긴 성장기이다. 달려본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뭐시기가 있다.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루키의 미문으로 만나볼 수 있음에 감사하다. 러너들은 비로소 언어를 갖게 되었다. 음악 애호가인 그가 엄선한 곡이 경쾌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독자들은 하와이에서 일본 시골 마을까지의 런트립(run+trip)에 동행하게 된다.



그는 달리기로 세계를 인식한다. 주로(走路, 달림길)에서 자신에 대해 관조하고, 타인과 자연환경을 관찰한다. 만물이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이를 통해 젊음과 나이듦, 삶과 죽음, 정신과 육체에 대해 성찰한다. 계절의 흐름 속 자신이 우주의 티끌임을 알아차리기도 한다. 달리기로 철학하기. 하루키는 철인(鐵人, iron man)이자 철인(哲人, philosopher)이다. 특히 소설가로서의 업인 글쓰기와 달리기를 엮어짜는 대목에서 배울 점이 많았다. 업에 우선순위를 두되, 어느 것 하나 포기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그는 달리기가 삶, 그리고 글쓰기의 메타포라고 말한다. 그의 수기를 읽노라면 달리기와 글쓰기는 같은 선상에 있어,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 읽고, 쓰고, 달리는 모임의 지정 도서로서 이 책을 읽게 됐는데, 이보다 적절한 선택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달리기 명상에서 필자는 별안간 요가를 읽어냈다. 그러니까 '달리기는 어떻게 요가가 되는가'를 알 수 있는 책이었다. 요가에 이제 막 심취한 요린이(요가+어린이) 필자가 보건대, 요가 수련의 고갱이가 달리기로 치환되어 거기 있었다. 요가란 무엇인가. 지금, 여기에 몰입하는 훈련이다. 그가 말하는 달리기 또한 그렇다. 달릴 때, 그는 그저 ‘지금의 기분’에 집중한다. 강물이나 구름처럼 순간을 지날 뿐이다. 그래서 그의 책은 갓 짜낸 기름처럼 신선하다. 서술 시점은 항상 오늘이다. 각 장이 특정 날짜인 데서 알 수 있듯 말이다. 옛 일에 대해 말할 땐, 당시 썼던 글을 가져와서 선도를 유지한다. 가끔 과거를 회상하지만, 후회하거나 연연하는 법은 없다.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100키로를 달릴 때, 그는 ‘내가 당면한 세계는 기껏해야 3미터 앞에서 끝나고 있다. 그 앞의 일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또 다른 단서는 서문 제목에 빤히 보인다: '선택 사항으로서의 고통'. 이것은 요가의 분리주시가 아닌가. 고통을 명상의 도구로 삼아 대상(나)을 떼어놓고 바라보는 것 말이다. 하루키는 이 책이 '신체를 움직임으로써 스스로 선택한 고통을 통해 배운 것’이라고 썼다. 이는 제6장 100km 울트라 마라톤 에피소드에서 오롯이 드러난다. 제아무리 숙련된 마라토너인 그도, 55-75키로까지는 고통에 휩싸인다. 그래서 그는 ‘나’라는 관념에서 벗어나기를 시도한다.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아무것도 느낄 필요가 없다’ 마침내 75키로에서 ‘뭔가가 슥 하고 빠져나갔’고, 육체적 고통은 물론 자아 의식을 잊는다.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 그는 100키로 달리기로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을 터득했다고 썼는데, 이 또한 몸의 훈련으로 마음을 닦는 요가 수련과 닮았다.



문득 100k 마라톤에 대한 도전 의지가 생겼다. 하루키의 체험에는 수련이 짧은 필자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경지가 있다. 그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을까 해서. 요가 수련을 위해 달리기를 해야겠다고 맘 먹은 것이다. 고통과 벗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필자는, 75키로 이후의 내적 성찰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의식의 공백화’, ‘약간 다른 장소’, ‘체관(諦觀)’이라고 말한 그것이다. 아직 내 속엔 내가 너무 많다. 때로는 타인에 기준점을 두고 스스로를 몰아세운다. 반면 하루키의 기준은 ‘자신 안에 조용히 확실하게 존재’한다. 달리며 글쓰며 착실히 내면을 다져나간다. ‘자극하고 지속한다. 또 자극하고 지속한다’. 과거의 나로부터 이별하고, 새로운 나를 향해 자기변모를 거듭한다. 이것이 요가 수행자가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달리는 소설가는, 곧 수련하는 소설가이기도 하다. 우리가 아는 요가 아사나(자세)를 취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결국 나는 요새 요가만 하지만, 달리는 중이었다. 책을 덮을 때 쯤 내 화두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다. 20대 때는 ‘문화는 정치, 일상의 진정성’에 꽂혔는데, 지금은 요가 수련에 마음이 동한다. 요가를 만났다고 해서 내 삶에 꽃길만 펼쳐지는 건 아니다. 여전히 괴로운 일은 있고 욕망에 사로잡히거나 어리석은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 말마따나 그런 삶의 ‘독소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오직 전심전력으로’ 계속 수련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그러다보면 작가처럼 ‘실감과 경험칙’에 의거한 확실한 긍지로 인생을 긍정할 수 있지 않을까. 또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내가 좋아서’ 소설을 쓰고 달리기를 했듯 내게도 뭔가 춤추듯 찾아오지 않을까. 그때까지 매일을 수련하듯 살아내는 수밖에. 다른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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