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와 헤어지고 일 년 뒤, 나는 여전히 채팅을 하고 있었고 그러다 D를 만났다. 채팅 메신저로 이런 쪽지가 왔다. “혹시 00편의점에서 일하지 않아요?” 그 당시 나는 역 근처, 그러니까 작은 도시에서 그나마 제일 번화했던 거리의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맞다고 답을 했고, 그때부터 대화가 이어졌다. 이전의 경우와는 다르게 바로 다음 날 만나기로 했다. 상대편에서 내 얼굴을 안다고 하니 부담도 없었다. D의 외모는 내 이상형과 가까웠다. 키도 크고 적당히 마른 체격에 인상도 순박해 보였다. 무엇보다 약간은 긴장한 듯한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채팅했던 상대와 처음 만날 때 긴장하는 쪽은 늘 나였기 때문이다.
D는 백수였고, 서로의 집이 버스 한 정거장 거리여서 자주 만났다. 데이트하러 가는 길, 내가 먼저 버스에 타 있으면 바로 다음 정류정에서 D가 올라탔다. 그렇게 데이트를 시작하는 게 좋았다. 주로 시내에 있는 공원이나 카페, 도서관, 찜질방에 갔는데 어딜 가든 우리가 하는 건 같았다. 끊임없이 이야기하기. 서로 유머코드도 맞아서 데이트는 대체로 즐거웠다.
하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이 만남을 계속 이어가도 괜찮을지에 대해 의문이 드는 일들이 생겼다. D와 나는 취업준비 중이어서 돈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내가 데이트 비용을 더 부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 번은 같이 찜질방을 갔는데, 먼저 카운터로 향한 D가 자기 몫의 요금만 결제를 했다. 나는 처음 본 찜질방 직원 앞에서 너무나 부끄러워졌다. 차라리 나보고 2인 요금을 다 내달라고 하지 그랬냐고 말했더니 D는 왜 화가 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것보다 더 심한 일은 따로 있었다. 데이트 중 D는 누군가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통화를 하곤 했다. 누군지 캐묻자 모르는 사람과 시비가 붙어 싸웠는데 그쪽에서 고소를 해서 일이 커졌다는 거였다.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법원에서 오는 연락을 받는 거라고. D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나는 별거 아닌 게 아니지 않나 라고 마음속으로만 중얼거렸다. 하지만 앞의 두 가지 이유도 나에겐 헤어짐의 사유가 되지 못했다. 결정적인 이유는 D의 잠자리 요구가 집요했다는 것. 나의 거절이 반복되자 크게 싸웠고 그게 이별로 이어졌다. D의 요구에 넘어갈 뻔한 적도 있지만 모텔비를 반반 내자는 D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이별 후, 한동안은 D에게 연락이 오곤 했다. 내가 연락을 씹으면 문자로 화를 냈다가 미안하다고 했다가의 반복. 혼자 난리부르스였다. D가 화를 내는 정도가 꽤나 심각해서 무섭기도 했는데, 다행히 오래가진 않았다. 그러다 1년쯤 지난 뒤, D에게 잘 지내냐는 연락이 왔다. 당황했지만 한편으론 반가운 마음도 들어서 답장을 했는데, 얼마 전 출소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 문자를 보자마자 핸드폰을 닫았다.
D와의 만남 이후로 채팅은 끊었다. 그제야 나는 채팅으론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날 수도 없고, 제대로 된 연애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덕분에 7년간 연애를 하지 못한다. 중간중간 짝사랑을 하기도 하고, 소개팅도 하고, 썸을 타기도 했지만 그게 연애로 이어지진 못했다. 그러다 20대의 마지막 해에 E를 만난다.
같은 교회 친구였다. 오래 알고 지내긴 했지만 그렇게 친하게 지낸 사이는 아니었다. 주변 지인들이 나에게 E에 대한 칭찬을 하곤 했지만 이성적으로는 전혀 관심이 가지 않았다. E가 어떤 사람인지와는 상관없이, 작고 통통한 외모가 나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E와 잘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던 나는 어느 비 오는 날, 그 다짐이 무너지는 순간을 만난다.
공휴일이었다. 아는 언니를 만나러 가기 위해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길 건너편에서 E가 보였다. 그제야 E가 오늘 우리 동네로 이사온다는 소식을 들었던 게 기억이 났다. E는 나를 발견하고는 길을 건너왔다. 우산도 쓰지 않은 채였다. 우리는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리고 모든 일정을 끝내고 다시 집으로 걸어가던 중, 다시 E와 마주쳤다. 이번에도 어색한 인사를 나눈 뒤 헤어졌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자꾸만 E가 떠올랐다.
그 후에도 E와 자연스럽게 만날 일이 자주 생겼다. 아니, 그럴 일을 내가 나서서 만들었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E는 나의 제안에 한 번도 빠짐없이 응해주었다. 그렇게 감정에 확신이 생긴 나는 E에게 더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E도 나에게 호감이 없진 않다는 걸 아는 데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몇 달간의 다소 긴 썸을 타다가 E의 “직접적인 고백”을 계기로 서로의 여자친구, 남자친구가 되었다. 이번엔 정말 제대로 된 연애였다. 남들처럼 싸우기도 하고, 그러다 뜨겁게 사랑하기도 하고, 같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그리고 알게 된다. A, B, C, D와 E는 연애의 목적이 다르다고. E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인 것 같았다. 나를 사랑하는 것. 그때부터 지금까지 E가 내 곁에 있는 이유는 그거 하나뿐이다.
결말을 멋지게 쓰고 싶었다. 나처럼 망한연애의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럴듯한 조언과 위로의 말을 덧붙여서. 하지만 그러자니 도무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건 이전의 내 연애에서 정말 얻은 게 하나도 없다는 말과 같았다. 그나마 얻은 게 있다면 온라인 만남은 피해라 정도일까. 며칠 전, E가 나에게 물었다. “이 글은 언제 끝나?”라고.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나는 그걸 연애라고 치지도 않는다고, 너랑 한 연애가 첫 번째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어쩌면 이게 내 연애사의 결론일지 모른다. 이전의 연애를 자신 있게 “망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모두 지금은 남편이 된 E덕분이라고. 그저 묵묵히 좋아요를 누르며 내 글을 읽어주는 남편에게 이 글을 바친다.